1970년 4월 군 입대 후 훈련과 복무 속에서 개인적 공부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딱 한 번의 휴가기간에 서울대 부고 2년생을 상대로 실제수업지도 시험을 치르고 제대 직전에 임용고시합격, 제대 후 1주일 만에 초임 발령은 내 인생의 새로운 돌파구가 되었다. 2년 동안 내 전공과목 미술 외에 도덕과목을 가르쳤는데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서는 항상 몇 사간 분량만큼 앞서서 확실한 예습을 해야만 했다. 민주생활, 승공통일의 길이란 두 권의 교과 교재연구는 학생들을 위한 최선의 봉사였었다.
남학생은 60여명씩 두 학급인데 여학생은 73명이라 이름 외우기도 힘들었다. 첫 학교에선 갖가지 장부가 많았다. 잘 드는 솜씨라며 무조건 표지글씨는 내게 맡기는 바람에 다른 곳에 전근을 가서는 ‘그림은 그려도 글씨는 못쓴다’는 연막작전을 펴기도 했다. 한번은 학교 건물 벽에 사다리를 놓고 수 백 미터 밖에서도 보이도록 한 글자크기가 1미터가 넘는 ‘국기사랑 나라사랑’이란 글씨도 직접 썼다. 그 당시에는 시간외 수당도 없었지만….
그 시절에도 창의력 교육을 강조했는데 학생들에게 잘 가르치겠다는 열정이 넘칠 때 창의력은 꽃핀다고 판단한 나는 학생이 특별하고 훌륭하게 되도록 돕는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남다른 계획과 추진에 열성을 다 했다. 무슨 학급자랑이니, 마을자랑, 학교자랑 경연이 있으면 시나리오 작성에서부터 연습과정을 따라다니며 챙겨 꼭 1등을 안겨줬다. 지금의 영재교육에 힘썼다고나 할까.
학생들을 위한 훈화자료로는 평소에 보던 독서신문이나 기업체의 사외보, 월간샘터, 삼성문고 등 소책자를 활용했고 지금처럼 컴퓨터나 영상자료가 없던 시절 봉급액수와도 맞먹는 대형 서양미술사 전집 12권을 월부 구입해 감상교육을 시켰다. 그 책을 본 제자들은 30년이 넘도록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시절 나름대로 물자를 아껴 쓰도록 교육한다는 것이 아직 남은 군대 체질(?) 때문에 심한 장난이나 폭력, 철없이 행하는 도벽행위 같은 걸 보면 과잉 대응한 적도 있어 학부모를 찾아가 사죄한 일도 있었다.
학생들은 틈만 나면 군대 이야기를 해 달라고 했고, 얼굴도 알지 못하는 여성과 펜팔하던 에피소드는 나의 십팔 번 레퍼토리가 돼 있었다. 장맛비로 강물이 넘쳐 4~5시간도 먼 길인데 힘들게 우회한 적도 있었고, 신축 건물에 학생들이 신발을 신고 출입한다하여 교감선생님이 직접 학생들 등짝을 후려치는 광경도 목격했다. 부조리 척결의 여파로 촌지 단속이 심하다싶더니 학생소풍 때 선생님 점심은 교사도 직접 도시락 사가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대부분이 쉬는 일요일에도 아침 일찍 한 두 마을을 분담해 학생 조기청소 지도교사 일에 매진해야 했다. 그 당시에는 불평불만 없이 오로지 국가적 캠페인에 함께 동참한다는 자부심이 워낙 컸었다. 도덕 시간에 ‘든사람’, ‘난사람’이 되지 말고 그보다 ‘된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내가 아닌가?
개교 이래 한 번도 시도하지 못한 서울 수학여행! 고궁과 대공원 중심으로 계획하고 사전에 일일이 가정방문을 통해 설득과 협조를 구하러 다니는 수고를 낙으로 여기며 인원 확보에 성공한 다음 인솔해 간 학생수학여행. 돌아온 날 학생반응은 평생 잊지 못할 감동 그 자체였다. 잘 배우고 왔느냐는 교장선생님 말씀에 우리 반 S는 “목이 다 쉰 걸요”라고 대답하던 것이 지금도 생생이 들리는 듯하다.
근무 2년 만에 집 가까운 곳으로 옮겨야겠다는 판단으로 내신을 제출했다가 더욱 골짜기학교로 가면서 제자들과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헤어졌다. 길에서 만난 부실장 H에게 떠나게 된 사연 전했더니 금방 눈물 글썽이던 모습 지금도 눈에 선한데, 떠난 즉시 몇 통의 편지를 받았다. 특히 말썽쟁이 철부지 J란 녀석 ‘모친께서도 안녕하시지요?’ 라고 안부 묻는 대목에선 기특하다 못해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4~5년이 지나 대학생이 된 몇몇에게 저녁을 사 준 적은 있지만 세월이 유수 같아 몇 년전에는 40대 중후반의 그들이 졸업 30주년 사은회를 개최한 덕분에 제법 많은 제자들과 모처럼 정을 나누는 기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