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학교에서는 매년 문법 등 다른 과목을 가르치느라고 담임 맡은 반 학생들과 비교적 많은 시간을 함께할 수 있었다. 처음엔 자신 없었지만 ‘이 선생은 할 수 있어’ 라고 부추기시는 교감선생님 엄명에 따라 2년째 영어를 가르치다가 전공 외엔 영어밖에 맡을 수 없다는 신임교사에게 본의 아니게 인계한 일도 있고, 가정용 녹음기를 들고 다니며 방송극 녹음하듯 국어 수업을 연출한 경험도 잊을 수 없는 추억. 초임지 학교와 마찬가지로 우리 반 학생의 출석번호와 이름은 눈을 감고도 줄줄 외우면서 그들의 특징과 장단점을 꿰고 다녔다. 첫해 우리 반 실장 W군이 이름을 밝히지 않는 인사의 장학금을 받고나서 나중에 여러 선생님을 초대하는 잔치로 한 번 더 영광을 누리게 해주었다.
음악과 교사의 발령이 번번이 취소되는 바람에 예술, 정서교육분야에서 많은 피해를 입고 있었다. 일선장병들을 생각하면 한시도 그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하고 호국선열 그 넋을 추모하며 자투리 시간에 칠판에 가사를 적어가며 나름대로 '현충의 노래'를 가르치기도 하고 애달프고 감미로원 알면 정서 상 도움이 되겠다 싶어 건전가요 '석별의 정'을 소개하기도 했다. ‘날이 밝으면 멀리 떠날 사랑하는 임과 함께 마지막 정을 나누노라면 기쁨보다 슬픔이 앞서(중략) 우리 굳게 맺은 언약은 영원토록 변함없으리' 그 시절은 3년만기 목돈마련저축으로 1백만원을 모으던 신혼시절이었다.
3학년을 두 번 맡아 가르치며 경력이 나보다 많은 선생님과 함께 정말 눈물겨운 진학지도 프로그램을 수행했다. 담임 3명이 매주말 시험문제를 출제하고 인쇄(등사)해 치른 '주초고사'다. 난 중요과목 담당이 아닌 유일한 교사라 국어, 수학은 담임이 맡고 영어시험 등사는 늘 내가 맡았다. 성적을 올린다는 사명감에 1년을 하루같이 열과 성을 다했다.
고등학교 때 그려놓은 미술작품들을 수업교재로 사용하기도 했는데 6~7년 활용했던가? 작품 한가운데 접은 흔적이 전쟁의 상처마냥 선명하다. 지금은 ‘우리집 홈페이지’ 나의 갤러리에서 볼 수 있다. 그 시절 울도 담도 없는 남의 집 셋방살이 하느라 한 번은 연탄가스 사고로 온 가족이 큰일날 뻔한 적도 있었다.
1976년부터 ‘정례반상회 날’이 매월 25일 전국적으로 일제히 시작됐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내가 맡은 동네까지 걸어서 반에 참석한 학부모들을 만나고 그들의 궁금증과 학생이 밝히지 않던 속 깊은 얘기까지 나누는 계기가 됐다. 반상회는 그 후 자율적 개최로 전환, 지역에 따라서는 지금도 사이버 반상회를 도입하는 등 오늘날에 이르고 있지만 그때 학부모님들이 선생님 은혜 만분의 1이라도 갚겠다며 살갑게 대해주던 인정을 영영 잊을 수 없다.
1979년 겸무발령. 소속은 여중으로 3학급만 가르쳤다. 한 번은 수업 중 판서하며 설명 중에 교실에 있던 모든 학생들이 이구동성 ‘엄마야!’하고 뒷문으로 줄을 지어 달아나는 바람에 순간 무슨 이무기라도 나타났나 싶어 난 얼굴이 백짓장이 되었다. 2~3초 짧은 순간이었지만 등 뒤에서 들려온 괴성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알고 보니 날씨 궂을 때마다 한 번씩 발작하는 아이로 짝꿍과 둘이 꼭 안고 있었다. 복도로 나간 학생들을 불러들이며 훈계는 했지만 미쳐 파악하기 벅차도록 담당 학급 수가 많아 생긴 에피소드였다.
멀리 떨어진 또 다른 학교에서도 남녀학생들이 미술과목을 배우려고 목요일이 돼야 오는 나를 기다린다. 버스를 타고 돌고 돌아 40여분만에 도착한다. 선생님들은 나를 보는 순간 주말이 가까워 온다고 좋아했고 학교환경 정리가 시원스레 해결되니 반겼다. 정월대보름인가 친목행사 때 연 윷놀이와 돼지고기 파티는 흐뭇했던 추억이며 천하 일미였지만 1년 동안 내겐 또 하나의 근무지가 더 있었다.
그러니까 월요일 여중, 화요일은 여중과 여고에서, 수요일은 여고 수업, 목·금·토는 면소재지 제자들을 가르쳐야 했기에 3학교 6개 학년 20학급 24시간 담당이다. 여중에서 여고 지원을 받는 음악수업 때문에 챙겨줘야 하는 여고 미술수업은 6시간에 8학급을 가르쳐야 하지만 합반수업 할 교실도 특별실도 없이 2학년은 50분을 두 교실 번갈아 순시하며 이론과 실기를 가르쳤다. 얌전하고 순박했던 그 시절 잘 따라준 학생들이 고맙기만 하다. 그들 중 내가 세 들어 살던 집까지 찾아와 수채화 배우던 학생들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나이 쉰을 넘겼을 3명의 제자들이 보고 싶어진다.
한 번은 담당 장학사님께 나의 고충과 학생들의 교육 여건을 장문의 편지로 호소하기도 했지만 당시 교육여건상 겸무교사가 다 그렇듯 교육력도 만족시키고 교사도 능률적인 딱 부러진 해결방안은 없는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