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 끝에 낙인가. 지난 6년 농촌학교의 추억과 겸무 1년의 고행을 뒤로하고 대구명문 D여고에 발령을 받았다. 지난해 여고 수업경험은 보약이 된 셈이다. 학교가 시내 한복판에 자리했던 시절 30여분을 걸어서 출근했다. 버스를 기다리는 일도 짐처럼 실려서 가는 일도 마음 편치 않았다. 수업 20시간, 담임을 맡지 않았으나 3주 이상 임시담임 한 적은 있었다.
일생 처음으로 장만한 내 집 근처 범어동 교사로 이전한 후 한동안은 환경정리가 벅찬 일이었다. 수십 년 학교 복도와 계단 벽면을 장식했던 작가나 졸업생들의 미술 서예작품 액자들을 그대로 옮겨와 신축건물 4층 전체의 빈 공간에 배치하고 진열하여 사람 사는 살아있는 공간으로 단장하는 일은 노동이요 부역이나 다름없었다. 유리액자 서예이거나 작품 규격이 웬만하면 100호, 200호에 해당하는 그림들이라 고용직 직원 외 미술교사는 나 혼자뿐이어서 높이와 좌우 여백에 맞도록 위치를 정하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81학년도 고입연합고사 출제위원으로 선발됐다. 과목마다 가장 훌륭하신 여러 선배 교사 분들 가까이에서 입시업무를 담당하는 경험을 쌓았다. 대구은행 저축포스터공모전 소식을 듣고 수업시간 중 가장 색채 감각이 뛰어나고 주어진 과제를 충분히 소화해 낼 학생을 선발 지도한 후 출품해 실업계 고교생들이 판치던 수상자 명단에 은상 수상(상금 18만원)학생을 탄생시킨 일은 디자인 지도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준 사건이었다. 학생 선정에서 나의 판단이 적중했고 물론 아이디어와 중간의 여러 과정에서 나름대로의 요령과 기법으로 가르치고 합작한 결과 내게도 지도교사상이란 상패가 왔다. 예나 지금이나 대학입시 준비에 신경썼지 나 이외 아무도 관심 갖지 않은 일이 아닌가 싶다.
정서, 예술교육에 관심이 많던 교장선생님 덕분에 자습시간 오르간 반주에 맞춰 ‘다함께 노래 부르기’는 아침마다 음악적 분위기로 감싸줬다. 고등학생 축제의 장이자 발표행사의 꽃이었던 미술전시회는 시내 중심가의 담벼락 거리 전시회가 특징이었는데, 신축 이전 후에는 도서관 천정에 철사를 연결해 전시하는 방법으로 전개됐다. 학생들은 미술학원에서 배우는 학생이 더러 있어 전시회작품의 수준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됐다. 그 후로도 교육회관 전시실을 빌려 전시하는 등 다른 학교로 전근을 하더라도 20년 고교근무기간 내내 미술전시는 빼놓지 않았다. 학생실기지도와 개최는 방송제, 시화전, 무용발표회와 함께 연중행사였고 1980~90년대는 다른 학교 학생들의 관람으로 미술전시장은 북적거렸다. 그 당시 미술실은 준비실, 캐비넷, 석고상과 학급별 화집정리 공간만 설치됐지 자료를 진열하고 보여줄 진열장 하나 없었다. 바가지공예, 모자이크, 색채구성 등 여고생 취향에 어울리면서 평면과 입체적 실기지도를 다양하게 펼치는데 목표를 두고 수업했다.
4년 후 남고인 D고교에 옮겨온 뒤에도 학생미술전시회는 계속 미술과 중심으로 치러야 하는 가장 큰 연중행사였는데 미술전시회에 사용할 전시판 100여개를 교장선생님이 틈틈이 고용원과 함께 합판을 자르고 쇠파이프를 용접하고 잘라 직접 만드시던 광경은 지금도 생생한 기억이다. 나는 똑똑한 남학생들이 탁월한 미적 자질 없이도 잘할 수 있겠다 싶어 학급별 대규모 합동작품을 제작하게 했는데 전시효과가 대단했다. 표현재료로는 우유팩이나 단추, 병두껑, 음료수 캔, 젓가락 등 재활용이 강조되는 버려지는 물건들을 이용한 벽화나 기념탑 추상형 구조물 등이었다. 옥상계단 미술실이 작업공간이었는데 학원에 다니지 않는 가난한 학생들이 밤늦게까지 연구하고 창조적 개성적 작품을 만들며 선후배의 끈끈한 우정을 쌓아가는 아지트여서 수시로 활동 상황을 돌아보고 지도 감독해야 했다.
이곳 인문계고교에서 딱 한번 학급담임을 맡았는데 밤늦게 남아 자습 감독도 하고 많은 학부모와 상담을 펼치기도 했다. 담당 학급에 대한 열정의 결과인지 우연인지는 모르나 3년 후 S대학 합격자 3명 중 2명이 내 반 출신이었는데 지금 그들의 인생역정은 알 수 없지만 지금도 만나면 단번에 알 것 같다. 담당학급 24, 수업시수 24시간으로 똑같은 내용을 최소 열 두 번씩 전달해야만 했고 기말고사 답안지는 방학 때 며칠을 두고 손으로 채점해야 했다.
또 힘겨웠던 추억은 3명의 Y대 교생을 지도하고 있는 도중에 K대 13명 교생을 담당하게 된 일. 입시경쟁에 고교마다 교생을 받지 않겠다고 거부하는 바람에 낙동강 오리알이 된 교생들을 본교 교장선생님이 모두 받기로 한 것. 강당은 한 달 이상 교생으로 넘쳐나, 미술과 16명 교생수업을 봐주고 교생일지를 검토하고 담임과 전공교사로서 지도의견을 적는 일은 장시간을 요하는 일이었다.
교장선생님이 바뀌고 한 번은 미술교사인 내게 한 마디 양해 없이 미술실 한쪽이 장서들로 채워져 수업이 불가능하도록 하여 불만을 터뜨린 일, 교무실 책상이 모자라 미술실 교사 테이블을 잠시 빌려주면 새 제품이 도착하는 즉시 갚아주겠다는 약속을 어긴 채 감감 소식이던 교무주임께 항의한 일, 학교 전체 환경구성물 작성에 동원된 교사들 중 솜씨가 너무 차이 난다면서 내 솜씨로 통일하는 게 낫겠다는 뜻으로 말한 선배교사에게 성질을 내기도 한 것 모두 지나간 추억이다. 이 학교는 2000년대에도 학교연혁지를 보냈는데 80년대 교우지 표지화인 나의 작품이 학생작품으로 잘못 소개돼 수정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 전에 누군가 잘못 정리해 놓은 것 그대로 참고하다보니 그랬다는 변명이었지만 전국의 학교, 도서관에 소장될 책자에 편집이 허술했던 데 대한 개인적 불쾌감과 서운함은 지금도 쉽게 잊히지 않는다.
이 시절 개인적으로는 과거 남의 땅을 침범해 지은 불법건축주 때문에 본의아니게 울며겨자먹기로 집을 한 채 더 사게 되었다. 집의 가치를 높이려 퇴근 후 구멍만한 가게를 교대로 운영하며 정신없이 살았다. 종종 고기반찬 대신 아이들에게 닭발을 요리해 먹이는 등 지출을 줄였으며 넓은 집은 세를 놓고 좁은 공간에서 사느라 상자 속에 묶여 쌓아둔 책들은 곰팡이가 필 정도였다. 봉급은 저축하고 구멍가게 수입으로 살 정도로 살인적인 근검절약한 생활 그 자체가 너무나 대견하고 잊을 수 없기에 가계부체험담공모에 부부가 같이 협의하고 여러번 고쳐 작성한 글이 아내 이름으로 장려상에 당선된 일이 있다. 방송국 출연교섭이 왔지만 아내는 차려입을 옷이 마땅찮다며 사양했고 지방신문 인터뷰 기사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