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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순진해서 좋은 아이

며칠 전, 쉬는 시간이었다. 우리 반 성제가 슬며시 내게로 다가왔다. 못하게 해도 어느새 등 뒤에 나타나 어깨를 주무르며 이것저것 요구사항을 늘어놓고는 그걸 들어달라고 응석을 부리는 일이 자주 있는 아이라 또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걸어왔다.

"우리나라에서 아직 가보지 않은 곳 어디예요?"
"이름난 곳은 다 다녀왔어."
"어, 그러면 안 되는데…."
"그걸 네가 왜 걱정해?"
"제가 나중에 선생님 여행시켜 드릴 건데 외국여행은 돈이 너무 많이 들잖아요."
"아이고 고마워라. 그렇다면 제주도 여행만 시켜줘도 고맙지."

그날 성제의 얘기는 자기가 좋아하는 선생님이 여행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기에 커서 돈 벌면 그동안 가보지 못한 곳을 구경시켜줄 계획이란다. 그런데 국내는 다 다녀왔다니 갈 곳이 외국밖에 없어 돈 때문에 약속을 못 지킬까봐 걱정이라는 것이다. 말만 들어도 고맙고 배부른 얘기였다.

사실 성제는 느린 행동과 엉뚱한 소리로 우리 반 모두를 웃기는 코미디언이다. 잘생긴 성제가 제 깐에는 열심히 한다고 애를 써도 타고난 몸매 때문에 친구들보다 행동이 느리다. 삐뚤빼뚤 알아보기 어렵게 쓴 글자 지우고 다시 쓰느라 늦게까지 남아있는 날이 많다. 그래도 배운 것 평가해보면 정답을 척척 써낼 만큼 두루 아는 것이 많아 아이들에겐 괴짜로 통한다.

하는 행동으로 보면 시비 붙는 아이들이 많을 것 같은데 친구들과도 잘 어울린다. 오히려 쉬는 시간만 되면 짝을 바꿔가며 장난치기에 바쁘다. 수업시간에 장난치다 꾸중 듣고 눈물까지 흘려도 아이들이 모두 교실을 비운 후에야 친구 때문에 발단이 된 자초지종을 슬쩍 비치는 속 깊은 아이니 그럴 만도 하다.

어떤 일이든 먼저 해야 직성이 풀리고, 작은 일에도 상처받는 게 아이들이다. 괜히 남녀가 할일, 자리, 순서를 따지며 시간만 보내 급식시간에는 배식 순서에 맞춰 차례대로 앉게 하고, 국물 등 음식물을 쏟을까봐 자리이동을 못하게 한다. 그런데 성제는 2학기 들어 시간마다 식판을 들고 내 옆으로 온다. 아이들 급식 지도하다보면 제일 늦게 배식 받는 게 담임이다. 빈자리가 있는 여자들 줄에 앉자 기다렸다는 듯 옆자리를 차지한다. 주변의 여자 아이들이 그냥 지나칠 리 없다. 왜 자리를 옮기느냐고 예서제서 한마디씩 한다. 듣고 있던 성제가 "여자들은 싫은데 선생님이 좋아 옆자리로 왔다."고 말하자 여자들이 아우성이다. 어수선한 분위를 수습한 후 성제에게 말을 걸었다.

"성제는 여자들이 싫어?
"예, 저는 여자들 다 싫어해요."
"그럼 엄마도 여자니까 싫어하겠네?"
"아니, 엄마는 빼놓고요. 참, 여자들은 싫은데 인구문제 때문에 결혼은…."

성제의 입에서 튀어나온 엉뚱한 소리 때문에 밥 먹다 말고 웃음보가 터졌다. 인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결혼은 하겠다는 말로 여자를 싫어하지 않는 속마음을 내보인 순진함에, 귀여워할 수밖에 없는 행동에 박수를 보냈다.

요즘 자기 잘못 인정하지 않고 눈에 힘주며 말대꾸 하는 되바라진 아이들을 봐서일까? 불현듯 이렇게 순진한 아이들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할 말 다하고, 알 것 다 알아도 마음에 꾸밈이 없고 순박한 이런 아이들이….

그러고 보니 글자를 느리게 쓰고, 학교에 늦게 왔다 늦게 가고, 가끔 생뚱맞은 생각을 하는 것도 '빨리빨리'가 능사인 세상에서 이 아이만이 누릴 수 있는 여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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