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아침마다 학교에 오고 있다. 책가방을 메고 한손에 실내화 주머니를 들고 멀리서부터 선생님을 부르며 달려오고 있다. 친구와 장난치며 웃으며 가로수 길을 달려서 나에게 오고 있다. 오늘도 즐겁고 신날 거라는 기대로 오고 있다. 아이들은 학교를 만나러 아니 나를 만나러 그리고 친구를 만나러 오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등교하는 신선한 아침에는 그 아이들의 호기심과 장난과 재미와 기대가 내게도 전해지는 것 같다.
그런데 교사인 나는 이런 아이들이 아침마다 기대에 차서 들고 온 빈 광주리에 무엇을 채워서 보내 줬을까? 나를 올려다보며 무언가 재미있는 걸 기대하고 있는 초롱한 눈망울을 애써 무시하지 않았을까? 호기심으로 탐색하고 꾸민 일을 늘 일만 저지른다고 질책하지 않았을까? 오늘도 무슨 일인가 신나는 일을 바라고 있는 아이들에게 어느새 교실에 들어서면서부터 질책의 말부터 하지는 않았을까?
아침 자율학습을 하지 않고 떠들고 있다고, 또 숙제를 해오지 않았다고, 공부시간에 친구와 떠든다고, 청소시간에는 청소는 하지 않고 빗자루로 칼싸움이나 한다고, 점심시간에는 골고루 먹지 않고 먹기 싫은 음식이 나오면 식탁 밑에 몰래 버렸다고, 받아올림이 있는 두자리수 덧셈을 하지 못한다고 야단만 가득 담아서 집으로 돌려 보내지 않았을까?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의 광주리를 무겁게 만들어 보내지 않았을까?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이 다시는 학교에 오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도록 심하게 야단을 하지는 않았을까?
아이들은 아직 모르는 것이 많아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그렇게 하루종일 말썽을 부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 재미거리를 찾다 보니 예기치 않은 일을 저지르기도 하는 것일 것이다. 내가 가르치는 대로 뭐든지 한번에 다 한다면 굳이 나에게 배울 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래서 교사인 내가 필요한 것이고 그래서 안전을 책임지고 바른 행동으로 이끌어 주며 잘 가르치기 위해서 내가 필요한 게 아닌가?
그런데도 나를 필요로 하는 아이들에게 늘 내 기대에 못미친다는 이유로 질책의 방법으로만 아이들을 지도하려 하지는 않았을까? 늘 입만 열면 야단치소리로만 아이들을 지도하는 교사는 아닌가 반성해 본다.
방과 후에 학교 밖에서 만나면 ‘선생님’을 부르며 달려와 내 팔에 안기는 사랑스러운 아이들로 가르쳐야겠다. 학교를 졸업한 후에라도 직접 찾아오지는 않더라도 나를 좋은 선생님으로 기억해 주는 그런 아이들로 가르쳐야겠다. 아이들과 쌓아가는 인간관계가 부디 연인과 같은 사랑과 친구와 같은 우정이기를 바란다. 그래서 격려와 사랑의 방법으로 가르치고 이해와 선도의 방법으로 바른 행동을 이끌며 부단히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며 아이들 앞에 서리라고 새삼스레 5월의 신록을 보며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