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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한 그루 배롱나무이기를

산은 바라보는 나이에 서서

이외수 님의 책 '청춘불패'에 따르면 내 시계는 풍류기(風流期)여야 한다. 오십대는 남은 인생 전부를 노니는 시기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 열심히 일하는 중이다. 눈이 침침하고 책을 볼 때는 돋보기를 써야 하며, 운전을 할 때는 먼 것이 잘 보이는 안경을 따로 써야 한다.

내 눈은 나에게 쉬어야 할 때임을 말해 주고 있다. 인디언 속담에 50은 산을 바라보는 나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세상이 살기 좋아져서 몸이 덜 고생하고 섭생에 신경을 많이 쓰는 세상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몸의 나이는 옛 사람이 말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그 선견지명에 놀랄 뿐이다.

사람이 생존 가능한 수명이 길어지고 있으니 50대를 풍류기로 보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지만 몸이 가리키는 시계는 아무리 우겨봐도 풍류기가 맞을 듯 싶다. 그렇다면 내 몸의 나이는 계절로 말하면 늦가을 쯤이 아닐까? 지난 세상 힘들게 일해온 내 나무가 뿌리를 쉬게 하고 더 이상 새 잎을 키우지 않으며 고운 자태를 드러낸 단풍잎을 달고 서 있는 늦가을의 아름다움을 지녀야 할 나이. 더 이상 일하지 않아도 남은 수액으로 고운 단풍을 달고 서 있는 가을 나무가 되어야 할 나이라는 사실을 내 몸은 말해주고 있음을!

내 인생의 가을이 이렇게 빨리 올 줄 모르고 앞만 달려온 지난 젊음 속에 두고 온 시간들이 아쉽게 나를 불러낸다. 좀 더 한가해지면, 좀 더 여유로워지면 가족들과 여행을 다니리라던 다짐, 친구들과 더 행복하게 노닥거리며 놀겠다던 바람도 모두 시간 속에 묻혀버린 것이다.  천 년 만 년 살 것처럼 일하고 아끼고 미루며 보내버린 여름은 가고 찬바람 불고 해넘이가 금방 다가오는 늦가을 앞에 서 있는 내 모습을 본다.

'껄껄껄'하며 살기를 바라며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김정운 지음)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대목은 "사람은 죽을 때 껄껄껄 한다. 좀 더 베풀고 살 껄, 좀더 용서하고 살 껄, 더 재미있게 살 껄"이었다. 마치 내 이야기를 미리 읽는 것 같아서 무릎을 쳤다. 앞의 두 가지는 그런대로 괜찮게 살았다고 생각하는데 마지막 재미있게 살 껄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즈음 나의 화두는 '껄껄껄'이다. 베풀고 용서하고 재미있게 사는 인생이라면 늦가을 붉게 타는 단풍나무나 석양의 아름다움에 결코 지지 않는 삶이라고 생각해서이다. 예년에는 무심코 지나치던 보름달이나 고운 꽃도 더 유심히 바라보게 되었다. 내가 살아서 저 보름달을 몇 개나 더 볼 수 있을 지, 노오란 개나리 꽃을 몇 회나 더 볼 수 있을지를 생각하면 순간순간이 마지막인 것처럼, 절박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내 인생의 시계는 지금 노란 은행잎이나 고운 단풍을 달고 선 나무이다. 아직은 몇 날 며칠 더 가을 햇살에 몸을 맡기고 마알간 가을을 음미할 수 있는 가을 나무. 그러나 언제 갑작스런 가을비가 내릴지, 때 이른 겨울눈이 내릴지 모르는 늦가을 오후를 붙잡고 서 있는 나무. 그러기에 내 인생사계는 언제든지 빈 몸으로 서 있을 준비를 하고 싶다.

한 그루 배롱나무이기를

할 수만 있다면 옷을 벗은 모습이 은행나무나 단풍나무보다는 배롱나무였으면 더 바랄 게 없겠다. 배롱나무는 꽃핀 모습도 아름답지만 이파리를 떨궈낸 모습이 더 고운 나무이다. 가지를 넓게 펴서 새들을 잘 품어주고 고운 꽃도 오래도록 달고 서서 행복을 선사하는 나무다. 함박눈이 내리면 미끄러지듯 보드라운 빈 몸에 앉은 눈마저도 살포시 안고 서 있는 모습은 마치 손자를 업은 할머니 모습 같아서 푸근해지는 나무라서 좋다. 특히 마른 잎이 내는 향은 더욱 은은해서 노년의 향기를 생각하게 한다.

한겨울에도 청정한 잎을 달고 서 있는 소나무처럼 매섭고 차갑게 이파리를 보듬고 싶지 않다. 사시사철 쉴 줄 모르는 소나무처럼 살아온 내 젊은 날을 보는 것 같아서 안쓰러운 소나무. 그런데도 아직도 나는 소나무처럼 계절을 모르고 살고 있으니 나무들에게 배울 일이다. 어쩌면 인간만이 계절을 모른 채 살아가는 아둔한 존재가 아닐까.

이제는 조용히 내려설 준비를 하는 나무처럼, 내 인생의 가을 앞에서 초를 재며 아무런 미련 없이 잎을 떨구는 나무처럼, 잎을 보낸 빈 몸이 더 아름다운 배롱나무처럼, 마른 잎이 향기로운 마알간 영혼 하나 갖기를! 뜨거운 여름 아침에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고 영혼의 바다를 헤엄치며 서늘한 가을 아침을 상상하니 마음부터 시원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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