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셋째날(19일) - 집안에서 느끼는 부끄러움과 원통함
새벽 4시 바깥이 밝아온다. 지난밤 현란함과 정적 속의 압록강변 도시들이 고요함에 묻혀 있다. 압록강 철교 너머 신의주의 동녘이 밝아 온다. 긴 시간을 짊어지고 흐르는 압록강은 그 사연만 하중도를 만들고 서해로 흘러간다.
조금 일찍 체크아웃을 하고 아침식사를 마친다. 집안까지 5시간의 여정을 맞추려고 서둘러 일행을 태운 버스는 강변을 따라 달리기 시작한다.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시차가 1시간이다. 압록강변의 풍경은 이채롭다. 낚시하는 사람, 미역감는 사람, 토사와 골재 채취를 하는 배 등 강의 풍요가 저절로 넘치고 있다. 또한 북한땅에는 인력으로 강둑을 보수하는 군인들이 보인다.
왕복 2차선 도로변의 농가 풍경도 한가롭다. 병아리가 모이도 쪼고 엄마 닭은 날개를 퍼덕인다. 유달리 붉은색을 좋아하는 중국 사람들! 복(福)이란 글자가 담벼락, 집안의 곳곳에 붙어 있다. 중국농가는 온돌구조를 갖추고 있다 한다. 주 작물인 옥수수를 수확하고 그 줄기를 말려 연료로 사용한다.
집안 가는 길은 깊은 계곡 사이에 난 길을 따라간다. 아래에서 올려다본 산 정상의 능선들이 칼날처럼 서 있고 그 위에는 푸른 하늘 흰 구름이 걸리고 흘러간다. 3시간 정도 달리고 나서 다리를 사이에 둔 요녕성과 길림성의 경계인 휴게소에 잠깐 쉰다. 버섯모양의 나무로 만든 간이 화장실 아래는 넓은 강이 흐르고 물놀이하는 아이들, 풀을 뜯는 소들이 보인다. 차 안에서 내리자마자 후끈한 열기와 풀냄새가 코를 감싼다. 여기서 집안까지는 74㎞ 정도 남았다.
정오를 넘긴 시각. 드디어 고구려의 옛도읍 지인 국내성 집안에 도착한다. 이곳은 압록강 중류로 강을 끼고 너른 평야가 펼쳐진다. 그리고 강 건너는 북한의 자강도 만포시이다. 손에 잡힐 듯 보이는 북한의 산자락엔 나무들이 보이지 않는다. 전부 베어내고 밭으로 개간된 모습이다. 흡사 우리 남해 창선도 고사리 밭의 풍경과 비슷하다. 높이 보이는 것은 구리광산의 굴뚝뿐이다.
집안은 배산임수의 지형이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천혜의 요새를 이루고 남서쪽은 압록강의 비옥한 토지와 통구하가 흘러 사람이 살기에 안성맞춤이다. 또 농산물, 임산물, 광물이 풍부하여 부를 축적한 여유를 가진 귀족이 많았다 한다.
정오의 열기를 느끼며 점심을 위해 북한에서 운영한다는 묘향산 식당에 들어간다. 중국식보다는 다채로운 우리 요리들이 구미를 당긴다. 특히 김치며 두부볶음의 깔끔한 맛이 며칠째 느끼지 못하던 한국사람의 기호를 되살린다.
음식을 나르는 여종업원들의 가슴에는 인공기가 새겨진 배지가 붙어 있다. 사뭇 거리감이 밀려오나 말이 통해 다행이다. 하지만 여종업원들은 사무적인 표정이며 말이 없다. 식사가 파할 무렵 간이 무대에서 '동포 여러분 반갑습니다', '반달', '아리랑' 등 북한조의 구성진 노래를 종업원들이 뽑아낸다. 노래를 부르는 여종업원의 생김은 비슷비슷하다.
문득 단둥 시내에서 들은 주체사상이란 말이 생각난다. 강 건너 압록강변에 사는 신의주 사람들은 특별하게 주체사상이 강한 사람을 선별하여 살게 하니 단둥 시내로 탈출하는 사람이 없다 한다. 그러면 여기 여종업원들도 상당한 주체사상을 가진 사람들일 것이다. 사진촬영을 하려고 하자 거부한다. 모두 흥에 겨워 손뼉을 치지만 갑자기 우울함이 몰려와 식당을 빠져나온다. 쏟아지는 햇살이 불과 1m 정도 남은 국내성의 남쪽벽에 쏟아진다.
국내성 성벽. 어쩜 우리의 역사현장을 저렇게 내버려둘 수 있을까? 성곽주변을 채소밭으로 만들고 성곽 돌을 뜯어서 밭의 가장자리 경계석에 사용하고, 온갖 쓰레기가 널브러져 있다. 단군의 후손으로서 서 있는 자신이 너무 부끄럽고 고개를 들지 못할 지경이다.
본격적인 집안의 고구려 유적답사가 시작된다. 제일 먼저 간 곳은 아직 국내성 성벽의 원형을 갖고 있는 서쪽벽이다. 옆으로는 통구하가 흐르고 성벽 안쪽에는 아파트가 여러 동 있다. 이 서쪽벽은 중국이 국공합작 하여 일본과 싸우던 때만 하여도 그 둘레 2300m 높이가 10m 남짓하였다 하는데 지금은 거의 다 허물어졌다. 더 심한 것은 그 성곽 돌을 뜯어다가 건축 자재로 사용하였다 하니 무지몽매한 중국사람들 아닌가? 이 국내성터와 성곽은 2004년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한다. 하지만 관리는 허술하기 이를 데 없다. 세계문화유산등록을 위해 겉핥기식으로 보존하고 있다. 이것 또한 동북공정의 치밀한 계략이 아닌가 한다.
서쪽벽을 따라 흐르는 무심한 통구하를 바라보며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다. 20여 분의 탐방을 마치고 국내성의 위쪽 환도산성과 산성하고분군을 찾아 나선다. 환도산성은 100명이 1000명을 맞아 싸울 수 있는 천혜의 요새이다. 평소는 국내성에 머물다 외적이 침입하면 산성으로 들어가 항전을 하여 물리쳤다 한다. 병풍처럼 둘러친 산 정상의 가장자리에 투영되는 파란 하늘과 용트림하듯 오르는 흰 구름의 형세가 고구려인의 기상이 아닌가 한다.
잠시 눈을 아래로 돌린다. 사각형 형태의 수많은 돌무더기 고분들이 흐드러진 개망초 사이에 산재해 있다. 김도형 연구위원은 1970년까지만 해도 이곳은 옥수를 재배한 밭이라 한다. 이 거대한 돌무덤의 돌을 뜯어서 밭의 경계석을 만들고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자 아무렇게나 뜯은 돌은 다시 모았다고 한다. 그리고 산성하고분의 주인들은 대부분 환도산성에서 외적과 항전하다 전사한 고구려 귀족이나 병사들의 무덤일 거로 추정하고 있다 한다.
산재한 고분들을 둘러본다. 멸망한 옛 마야나 잉카제국의 후손들의 서글픔도 이랬을까? 그 서글픔은 쏟아지는 열기에 반사되어 파란 하늘이 된다.
환도산성을 뒤로 교과서에서만 보았던 장군총, 광개토대왕비와 능으로 이동한다. 과연 장군총은 동양의 피라미드라 할 만하다. 안내자는 장군총의 축성법은 가장자리에 홈을 만들어 밀림으로 말미암은 허물어짐을 방지하는 특이한 구조라 한다. 눈으로 확인하니 그 말은 확실하다. 그리고 무덤의 주인공이 장수왕인지는 확실치 않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 장군총이나 환도산성의 산성하고분군이나 모두 도굴의 손길을 피한 것이 없다는 말이 아쉽기만 하다. 장군총 아래에 딸린무덤이 있다. 후궁의 무덤이라 하는데 꼭 고인돌 모습과 흡사하다. 특이한 것은 덮게 석 아래에 홈을 만들어 빗물이 무덤 안쪽으로 타고 내려가는 것을 방지한 구조이다.
장군총에서 멀리 내려다보니 광개토대왕비와 태왕릉, 집안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광개토대왕왕릉으로 이동한다. 입장하기 전 옥수수를 사라는 어눌한 한국말의 호객꾼의 소리가 자꾸만 귀에 거슬린다. 대왕릉과 비를 중심으로 조성한 공원, 과히 공원이라 하기에는 어렵다. 곳곳에 복숭아와 자두나무가 서 있고 개망초만 군락을 이루고 피어 한스럽기만 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본 태왕릉은 거의 다 무너져 상단의 묘 실이 돌출되어 있다. 삐꺽거리는 나무 계단을 따라 올라가 묘 실을 본다. 금방이라도 돌무더기가 아래로 밀려 쏟아질 것 같다. 문화재라 하면서 관리에 소홀한 중국의 현실이 안타까우며 나 자신도 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니 부끄럽기만 하다.
광개토대왕비 앞에 선다. 고개를 숙여 기도한다. 높이 6.39m 폭1.38~2m 무개 37톤의 화강암에 총 1775자의 예서체로 음각한 비이다. 그중 마모가 심해 200여 자가 해독이 불가하여 삼국시대 일본의 우리나라에 대한 지배설을 주장하는 일본 역사학자들의 망언의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 안타깝다. ‘임나일본부설!’ 이 사실을 안다면 태왕릉에 누운 광개토대왕이 눈을 부라릴 것이다.
일제의 문화제 침탈은 다양한 형태이다. 광개토대왕비가 처음 발견되었을 당시 일본인이 구매하여 본국으로 옮기려 했으나 이곳 사람들이 반대하여 다행히 이 자리에 있다 한다. 하지만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중국도 매양 마찬가지이다.
광개토대왕비는 두꺼운 유리벽 안에 있다. 다행히 들어가 볼 기회가 주어져 가까이 볼 수 있는 행운을 안았다. 3면에 걸쳐 고구려 신화, 광개토대왕의 성장과정, 삼국의 역사와 대왕의 업적이 기록되었다 하다. 당나라 때 금지령을 무시하고 세운 이 비는 고구려인의 꺾이지 않는 기개를 후세에 보여주는 것이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있다. 노을빛에 개망초는 붉게 물들어 간다. 역사의 흔적은 있지만, 지금은 우리 땅이 아닌 곳. 흐드러지게 핀 개망초는 누구가 주인일까? 1300여 년의 고구려 숨결이 머물던 집안의 하루가 저문다.
밤이 되면 누울 자리를 찾아야 한다. 내일 백두산 등정을 위해 통화시내의 숙소로 가야 하는데 중국공산당 행사로 말미암아 미리 예약된 숙소가 파기되고 이곳 두 조로 나누어 한 조는 여기 다른 한 조는 서너 시간 더 가는 백산에서 묶는다고 한다. 다행히 내가 속한 조는 이곳 집안에 하룻밤을 묵게 되어 옛 고구려인의 숨결을 밤새 느낄 수 있어 아쉬움이 덜 하다. 어스름 지는 집안시내에 남쪽에서 온 소식들이 어둠을 따라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