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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난이'에게 인생을 배운다

'난이'를 처음 만나던 날은 막 새학기가 시작되던 작년 3월 초순 무렵이었다. 사실 그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기보다는 은은한 비취빛이 감도는 자그마한 청자화분에 더 눈이 갔었다.

거두절미하고 '난이'는 리포터가 애지중지 키우는 난초의 이름이다. 작년 초 어느 날 교실 한 귀퉁이에서 말라죽어 가던 녀석이었다. 학기가 끝나고 아무도 돌보지 않아 교실 한 귀퉁이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던 불쌍한 아이였다. 물만 제대로 주어도 아주 잘 자라건만 학년이 바뀌는 통에 학생들한테도 담임 선생님한테도 관심을 받지 못한 채 애처롭게 죽어가던 불쌍한 녀석이었다.

처음에는 혹시 살릴 수 있을까 하고 집에 가져다 깨끗이 목욕을 시킨 다음 베란다 양지바른 곳에 놓아두고 아침저녁으로 살펴보았다. 주말이면 시장에 달려가 녀석의 몸에 좋다는 영양제며 액비를 사다가 먹이고 공을 들였더니 어느 날부터 죽어가던 뿌리에서 새싹이 돋기 시작해 지금은 제법 촉수가 늘어났다.

우리 난이가 나에게로 온 지 1년째로 접어든 어느 날, 그 이파리 곁에서 아주 가늘고 길다란 줄 같은 게 계속 자라기 시작했다. 언뜻 지저분해 보여 가위로 싹둑 잘라냈는데 아뿔싸, 나중에서야 그게 바로 난이가 꽃을 피우려고 꽃대를 키우는 준비였음을 알게 되었다. 비록 말을 못하는 식물이지만 엄연히 살아 숨쉬는 생명을 필자의 무지로 제거해 버린 것이었다. 난이에게는 일생일대의 아름다운 미모를 선보일 기회를 놓쳐버린 셈이다.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난이에게 미안한 마음뿐이다.

난이는 비록 언어로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자신만의 신체언어로 나에게 분명한 의사를 전달한다. 예를 들면 목이 마르면 제일 아래 잎을 두어 개 늘어뜨린다. 얼른 물 한바가지를 듬뿍 부어주면 금방 환한 미소를 지으면 만족해한다. 끼니때만 되면 오늘은 어떤 것을 먹을까를 고민하고 두세끼만 굶어도 배를 움켜쥐고 배고프다고 법석을 떠는 우리 인간들의 모습에 비추어 볼 때 난이는 성인 군자나 다름없다.

여름 휴가 때문에 일주일 가량 집을 비웠다가 돌아와 보니 그래도 몸으로 반겨주는 것은 우리 난이 뿐이었다. "왜 이리 늦게 왔느냐? 어디를 갔다 왔느냐?" 시시콜콜 물어보는 기색도 없이 그저 이파리마다 튼실한 모습으로 아주 청정한 웃음으로 반겨 주는 난이에게서 나는 참을성을 보았다.

오늘은 된장찌개와 배추김치에 밥 한 그릇 뚝딱해치우며 행복에 겨워하다가도 이내 끼니때가 되면 뭐하고 밥을 먹어야 하는가를 걱정하고 살아가는 우리네와는 달리, 보름마다 물 한 바가지만을 먹고살면서도 초록빛 웃음을 보여주는 난이. 우리는 난이처럼 욕심 없는 간단명료한 삶의 방식을 배워야 할 것 같다.

유난히 습하고 무더웠던 여름이 가고 이제 선선한 가을로 접어드는 계절의 순환이 시작되고 있다.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두 해 동안 한결같은 표정으로 퇴근한 나를 반겨주던 난이를 보면서 나 또한 거듭 나고 싶다는 결심을 한다. 작은 일에 감사할 줄 알며, 한번쯤 생각한 후 말을 하며, 세상일에 부화뇌동하지 말며, 흔들림 없는 정직한 길을 가야겠다는 것을 다짐해 보는 것이다.

이번 가을은 왠지 난이와 함께 풍성함을 누려도 좋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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