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텅 빈 교실엔 적막감마저 감돈다. 방금 전까지 아이들의 떠들던 소리가 부유하는 먼지처럼 곳곳에 남아 떠도는 듯하다. 매번 학기말이면 느껴지는 쓸쓸함이다.
문득 녀석들에게 좀더 잘해 줄걸 하는 아쉬움과 후회가 밀려든다. 지수, 홍빈, 재호, 영철 등등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들의 면면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성격이 활달해서 우스갯소리도 잘해 반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정훈이, 피아노를 잘 치고 머리가 비상한 영규, 유독 자동차와 휴대폰 디자인에 관심이 많아 인터넷에 블로그를 개설하여 성인 빰칠 정도로 활발한 활동을 했던 태원이, 학급의 궂은 일을 도맡아서 했던 부반장 우리 건휘, 엄마 이야기만 나오면 닭똥 같은 눈물을 줄줄 흘리던 민호. 지금 생각해보면 한 명 한 명이 모두가 소중한 내 제자들이다.
여기저기에서 평가다 뭐다 해서 교권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무한경쟁체제에 내몰리는 학교 현실에서 하루하루 행복을 찾아가며 교단을 지켜내기란 정말 힘이 든다. 하지만 이 길이 내게 주어진 숙명이라 생각하고 오늘도 나는 죽을힘을 다해 교단을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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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년 8반을 맡아 담임으로서 학급을 경영하면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사건은 뭐니뭐니 해도 극락조화 절단사건이다. 학기 초, 학부모님께서 아이들의 정서순화를 위해 아름다운 극락조화 한 분을 학급에 기증하셨다. 사방이 시멘트로 꽉 막힌 공간에 멋들어지게 녹색의 위용을 자랑하는 극락조화는 한 줄기 청량제와도 같았다. 학교에 등교하면 제일먼저 극락조화를 바라보며 보살피는 것이 일상의 소소한 행복이었다.
밤사이 잎사귀에 앉은 멀지를 떨어내고 물을 주고 햇볕이 잘 들도록 위치를 옮겨주는 일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꽃 모양이 새의 화려한 날개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극락조화! 하루 종일 식물을 볼 수 없는 아이들에게도 신선한 자극제가 되어 좋았다.
그런데 10월 중순 극락조화의 가지가 열 개 정도로 늘어난 어느 날이었다. 평소처럼 7시 50분에 학교에 등교하여 교실에 들어선 순간, 난 경악하고 말았다. 그동안 애지중지 보살폈던 극락조화 열 송이가 모두 목이 잘린 채 널브러져 있었다. 잘린 부위에서는 마치 피가 흐르듯 맑은 액체가 그때까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선 채 잠시 그 처참한 광경에 넋을 놓고 있었다. 마음 속에서는 분노마저 일어나지 않았다. 저렇게 아름다운 꽃을 누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참수를 해버린 것일까. 아이들은 내가 경악하는 모습을 보며 키득거리고 있었다. 이런 처참한 광경을 보며 웃음이 나오다니…. 나는 아이들의 잔인함에 할말을 잃었다. 저렇게 심성이 메말라 있는 아이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8교시 보충수업까지 하루 일과를 모두 끝내고 종례시간이 되었다. 나는 엄숙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날씨는 이렇게 맑고 이 세상에는 수많은 생명이 살고 있다. 생명은 모두가 동일한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이 중에서 하찮게 여겨도 좋은 생명은 없다. 그런데 오늘 선생님은 너희들에게 큰 실망을 했다. 3월 초부터 너희들과 동고동락을 해왔던 우리 극락조화가 오늘 누군가에 의해 처참하게 절단되었다. 누가 무엇 때문에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중으로 선생님께 자수해라. 만약 자수하지 않으면 끝까지 추적해 반드시 처벌하겠다."
이렇게 말하고는 교실을 빠져 나왔다.
그 날 8교시 보충수업까지 마치고 난 뒤 잠시 교무실에서 쉬고 있는데 한 녀석이 교무실로 나를 찾아왔다. 자기가 극락조화를 참수한 범인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엊저녁에 일어난 일을 세세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음 그랬었구나. 그래, 그 녀석이었단 말이지? 전혀 예상외의 아이였다. 평소 활달하고 명랑해서 늘 웃음을 주던 아이가 그런 짓을 하다니…. 착잡한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무엇이 그 아이를 그렇게 잔인하게 만들었단 말인가.
그 날 종례시간 나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드디어 범인이 누구인지 선생님이 알았다. 하지만 공개는 않겠다. 범인도 지금 자기 자신이 얼마나 잔인한 짓을 저질렀는지 똑똑히 알았을 것이다. 평생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사는 것이 어쩌면 물리적 처벌보다 더 괴로운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양심의 처벌을 내릴 것이다.
범인으로 지목된 00군은 맨 뒷자리에서 고개를 푹 숙인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달리 생각해 보면 저 아이가 저렇게 된 것은 저 아이의 잘못만이 아니다. 눈만 뜨면 무한 경쟁체제에 내몰리도록 만든 우리 어른들의 잘못이 더 크기 때문이다.
자연의 변화에 둔감하고 그 아름다움을 느낄 줄 모르는 우리 아이들에게 오늘 밤, 하늘의 찬란한 별들을 보여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아이들이 떠난 텅 빈 교실을 빠져나왔다. 내 등뒤로 차가운 겨울 바람이 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