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 들이 진한 푸름을 발산하는 유월. 기억은 언제나 추억을 더듬는다. 늦겨울과 초봄 사이 일찍 꽃을 피운 매실나무는 벌써 실과를 생산하고 있다. 그리고 밭 언덕과 산길의 풀숲에는 오디며 산딸기가 달콤함을 풍기고 있다. 유월의 중간에서 통통하게 살져가는 찔레순을 보며 잠시 시간을 정지시킨 채 살며시 기억의 커튼을 열어본다.
장끼 소리가 메아리친다. 산길을 걸으며 흙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간 시골버스의 매캐한 냄새가 그리워진다. 지금 자라나는 아이들은 그 냄새를 알지 못한다.
들녘을 본다. 기계를 이용한 논갈이와 모내기가 하룻밤을 지나면 들녘의 풍경을 바꾸어 놓는다. 초고속 시대다. 느림이 일상이었던 시절 동네마다 보리타작 하는 원동기와 탈곡기 소리가 요란하였다. 비라도 내리려 하면 마을에 몇 대밖에 없던 보리타작 기계를 빌리려고 실랑이를 벌이던 모습, 타작 후 뒤끝을 태우는 자욱한 연기와 보릿대 타는 냄새가 아련하기만 하다. ‘이랴 이랴. 이눔의 소!’ 베적삼이 등에 달라붙고 흙탕물이 말라져 회색빛을 발하는 구릿빛 아버지의 얼굴, 가쁜 숨에 침을 흘리며 무논을 써레질 하는 소의 모습도 사라진 지 오래다. ‘못밥 묵어로 오시다’ 라는 외침도 기억에 가물가물하다. 이제 이런 모습은 다랭이 마을 써레질이나 농촌 체험으로 가능하다. 시골 농촌의 많은 기억은 정보와 기술 그리고 생활의 발전으로 영상으로만 남아 있다.
유월 이맘쯤 기억나는 것이 오디와 산딸기, 앵두이다. 생활이 풍족하지 않았던 시절 이것은 자연이 주는 즐거운 먹을거리였으며 산과 들의 풀숲에 숨은 보물이었다. 그것에 정신을 빼앗겨 발밑도 살피지 않고 가다 뱀에 놀라 기겁을 한 일도 다반사였다. 요즈음은 다량재배를 하여 대형매장에서 비닐랩에 포장되어 돈만 주면 사 먹을 수 있지만, 체험이라는 자연의 풋풋함을 느낄 수는 없다.
지난주 작은 아이와 같이 묵혀놓은 밭 가의 오디를 따러 갔다. 풀들은 키를 훌쩍 넘어섰다. 사르르 단맛이 입안에 녹고 입 주위와 손끝은 금새 진한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아이는 너무 맛있다고 신이 나고 물든 입가를 보고 큰 소리로 웃었다. 그리고 눈을 돌리니 저만치 가시를 매단 산딸기나무의 빨간 열매가 유혹하였다. 산딸기도 따먹자! 손등과 팔이 가시에 찔리고 할퀴어지는 따가움을 참으며 입에 넣는다. 정말 달콤하다. 아이도 사먹는 것과 비교가 안 된다고 한다. 양의 많고 적음을 떠나 자연과 교감이라는 열매가 더 달콤하였다.
지금 세대를 흔히 N세대라 한다. 이런 일들도 정보화 기기를 이용하여 간접 체험이 가능하다지만 어찌 직접체험에 비교하랴.
기억이란 소멸과 생성을 반복한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것이 생활 자체였던 시절엔 모든 것들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의도적인 기획을 해야만 가능해졌다. 산딸기를 따며 넘어진 팔꿈치의 생채기와 가시에 찔린 손등이 따갑지만 마음은 즐겁기만 하다. 잊혀가는 기억과 되새김이라는 징검다리를 건너 자연도 생활의 하나라는 선물이 유월을 더 싱그럽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