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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4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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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소식

유년의 여름나기

냉장고도 없었다. 에어컨이 무엇인지 몰랐다. 여름날 시원케 하는 것은 우물에서 퍼올린 찬물로 하는 등목이 최고였다. 이백 호가 넘는 마을에 냉장고와 텔레비전 있는 집은 두어 집 정도. 인기 드라마를 하는 저녁 밤 시간이면 텔레비전 있는 집 마당은 야외극장이 되었다.

칠십 년대 초반 우리 농촌 아이들의 여름풍경은 어떠하였을까? 까까머리에 등껍질은 까맣다 못해 껍질이 벗겨지고 눈 흰자위와 이빨만 하얀 채 반바지 차림으로 들과 개울을 놀이터로 삼았다. 당시의 농촌! 새마을 운동으로 초가지붕이 대부분 양철지붕으로 바뀌었지만 두서너 집은 아직 초가집을 그대로 이고 있었다. 그 집을 마을 이장과 새마을 지도자는 정부보조금 받지 못한다며 밤낮 드나들며 어르기도 하고 협박도 하였다. 그러나 이런 속내를 모르는 시골 아이의 여름은 즐겁기만 하였다.

유년의 여름. 아침을 먹기가 무섭게 시골 아이는 반바지에 검정고무신만 신고 신작로를 따라 들을 가로질러 시내로 간다. 하루에 버스가 몇 번 다니지 않는 신작로는 비포장이어서 전날 내린 비에 파인 웅덩이에는 누런 흙탕물이 고이고 덜커덩 거리며 지날 때 마다 흙탕물이 튀고 먼지가 풀풀 날린다. 그 때마다 시골 아이는 흙탕물과 먼지세례를 피하려고 숨을 들여 마셔 멈추곤 길 옆 아름드리 포플러 가로수에 몸을 숨긴다.

벼가 자라고 있는 논두렁을 뛴다. 뱀이 기어가고 물이 괸 고무신은 걸음을 옮길 때 마다 개구리 소리를 낸다. 들을 가로 질러 도착한 시내의 물이 깊은 곳! 약속을 한 듯 햇볕에 그을린 또래의 아이들이 모인다. 하루 종일 헤엄치고 다이빙도 아닌 배치기를 하며 아프다고 울고 웃으며 시간가는 줄 모른다. 그리고 놀다 지치면 뜨거운 자갈밭에 몸을 뉘고 자맥질 할 거라며 쑥을 짓이겨 귀를 막고 풍덩 뛰어든다. 한참을 물속에서 허우적대다 물밖으로 나와 작고 뾰족한 돌멩이를 찾아 귀에 대고 들어간 물이 마르라고 깽깽이를 뛴다. 참고로 여름방학을 마치면 귀에 물이 차 귀앓이를 하는 아이도 있었다. 이렇게 놀다 허기지면 다시 오던 길을 되돌아 집에 가서 찬물에 보리밥 한 술 말아먹고 입술이 파래지도록 논다.

풀벌레의 울음소리가 더해지고 어스름이 내릴 즈음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 허기는 지지만 먹을 것이 부족했던 때라 저녁은 배급되는 밀가루로 만든 수제비나 국수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별이 한 두어개 고개를 내밀기 시작하면 어른들은 마을 어귀에 모여 담배를 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아주머니들은 모여 모시나 삼을 삼고 누나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무리를 지어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반딧불이 반짝이는 깊숙한 냇가로 목욕을 간다. 어린 마음에 따라가겠다고 나섰다 머리를 쥐어 박히기가 일수였다. 딱히 놀 거리도 없었던 그날, 아이는 밀대로 엮은 멍석에 깔린 마당에 몸을 뉘고 하늘을 본다. 더없이 맑고 까만 하늘에 별들이 우수수 박히고 은하수가 무리를 이루며 시내로 흐르는 하늘가에 견우 직녀 별을 찾는다. 그 때 별똥별 한 개가 빛을 발하며 사라진다. 저 별똥별은 낮에 뽑아 초가지붕에 던진 이빨이 주인 찾아 굴러 가며 빛을 내는 것이라 하였다.

밀대와 짚으로 엮은 거적과 멍석은 평상이 없는 시골 농가의 여름밤을 지내는 자리였지만 언제나 부러운 것은 대나무를 얇게 쪼개 펴 만든 평상이 있는 동네 목수 아저씨의 집이었다. 멍석에 누웠지만 매캐한 모깃불 때문에 좀처럼 잠을 이루기 어려운 초저녁, 뒤척거리다가 겨우 겨우 잠이 들곤 하였다. 그 때는 열대야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이렇게 여름날은 말복을 지나 처서를 거치면서 서늘한 가을 기운에 자리를 조금씩 비켜주었다.

한계효용의 법칙이 있다. 갈증이 났을 때의 물 한 모금과 평상시의 물 한 모금은 가치가 다르다. 요즘은 생활수준의 향상으로 집집마다 냉장고, 얼음, 선풍기, 에어컨 등 여름나기가 훨씬 수월해졌다. 그래도 덥다고 한다. 우물의 시원한 찬물 한 바가지와 가물에 콩나듯 구경하는 얼음 한 덩이가 보석보다 값진 그 유년의 여름. 그 여름은 이제 기억 속에서 가물가물 해 지고 있다. 더우면 더운대로 추우면 추운대로 순응하며 지낸 지난날이 다양한 냉방기를 앞세운 지금보다 더 그리워진다. 조금 더 시원해지려면 에너지는 더 소비되어야 하고 그것을 충당하려면 지구의 온난화는 더 빨라진다. 이런 이율배반을 알면서도 편리에 젖은 현대인들은 아랑곳없다. 전력예비율이 위기 단계라는 뉴스를 접하며 문명의 이기와 편리를 모르면서 무던히 지낸 유년의 여름이 더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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