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지나간 태풍 산바의 흔적이 가을색 깊어지는 곳곳에 묻어나고 있다. 일찍 가을걷이를 마친 마늘밭의 스프링클러가 가을비의 인색함을 원망하듯 힘겹게 돌아간다.
노도 가는 길! 남해에 살면서도 지나치며 바라보기만 하던 곳을 찾는다. 노를 많이 만들었다 하여 붙여진 섬 이름! 서포 김만중의 유배 섬이기도 한 그곳을 가기 위해 가을빛 짙어 가는 앵강만 벽련마을 선착장에서 손전화로 사공을 부른다.
벽련에서 노도로 가는 짧은 바닷길. 배의 속력에 물살은 하얀 물거품을 일으키며 뱃전에 부서지고 바람은 머리카락을 날린다. 시선을 돌리자 호수처럼 잔잔한 앵강만 곳곳에 떠 있는 정치망 부표와 낚싯배들, 자개처럼 반짝이며 잔물결 이는 바다는 에메랄드빛을 풀어낸다. 이 바닷길을 서포 김만중도 건넜을 것이다. 돌아올 수 있다는 기약을 가진 이의 발걸음과 기약 없는 유배생활을 위해 가는 이의 발걸음은 어떠하였을까? 쾌속선도 아닌 삐걱거리는 노 젓는 소리에 멀어지는 남해도와 가까워지는 노도 사이에서 얼마나 절망하였을까? 절망의 깊이는 멀어지는 거리만큼 더하고 그리움은 배가 되었을 것이다.
엔진 소리가 잦아들자 배는 벌써 노도 마을 선착장에 도착한다. 채 5분도 안 되는 거리다. 마을 선착장 주변의 바다는 얼마나 맑고 투명한지 치어들이 노니는 모습이 그대로 다 비친다. 오염되지 않는 청정한 남해의 노도 가을 바다가 살아서 숨 쉬고 있다.
노도 마을, 13가구에 18명의 주민이 전부라 한다. 그 중 할아버지 5분, 할머니 13분이 이 마을의 전체 주민이라 한다. 선착장에서 조금 오르자 오래된 야생 동백나무가 이곳저곳 눈에 띈다. 폐교된 노도분교장을 오르는 좁은 골목길! 아직 햇살이 남아 있어 도란도란 묻어나는 인기척을 쫓아가자 구(舊) 노도분교장 맞은편 정자에 몇 분 할머니들이 모여 지나온 삶의 애환을 해풍에 날리고 있다. 구(舊) 노도분교장 들어선다. 손바닥 정도 될까 하는 운동장엔 봉숭아와 금잔화만 벌과 나비와 이야기를 나누며 지난날 섬 아이들의 모습을 그리워하고 있다. ‘이 좁은 운동장에서 공차기한다면 …….’ 가히 상상이 가질 않는다. 하지만 이곳을 포함한 주변이 문학의 섬 조성공사로 변화의 모습을 갖춰 5년 후엔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할 것이라고 안내하는 마을 반장님의 귀띔이다.
학교를 뒤로 왼쪽으로 돌아 서포 김만중의 초옥으로 향한다. 경운기나 다닐 만한 길 가장자리 산밭에는 짧은 가을 낮 손수건만한 햇살을 쬐며 서숙을 수확하는 노부부의 손길이 바쁘다. 바스락바스락 낙엽밟는 소리가 고요함을 밀어낸다. 섬의 곳곳엔 지난 태풍의 강풍으로 잎은 거의 다 뜯겨나가고 열매만 매달고 있는 감나무와 그나마 붙어 있는 활엽수의 잎들도 바닷물에 오그라들어 조락을 기다리고 있다. 사람이 그리운 곳 노도. 간혹 일상에 파묻혀 살면서 머리가 복잡해지면 깊은 산 속에 들어가 살고 싶다는 생각이 여기에서는 사치와 배부름이라고 말하자 반장님도 동조한다. 그리고 지금은 사라졌지만, 이 길보다 더 아래쪽 해안에 서포 김만중이 걸었다는 유배길이 있었다고 한다. 김만중의 유배지 초옥. 개보수로 인하여 유배 당시 초옥의 흔적은 찾기 어렵다. 단지 긴 세월의 한을 간직한 야생 동백들이 곳곳에 자라고 찰박거리는 파도소리만 절해의 고도임을 말해준다.
짧아지는 가을 낮 길어지는 겨울 밤! 한기를 머금은 바닷바람이 문풍지를 비켜가며 휘파람을 돋우는 고독의 시간을 붓 끝에 모으며 이곳에서 삶의 한을 얼마나 끓였을까? 그 한이 이른 봄 나무에서 한 번, 떨어져서 한 번 피우는 붉은 동백으로 살아나 이 섬 여기저기를 물들이지 않았을까? 초옥을 되돌아 나와 조금 위쪽으로 난 길을 따라 서포 김만중의 허묘를 찾는다. 가파른 견치석 계단이 주변과 조화되지 않아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하지만 오를수록 넓어지는 시야가 노도가 섬임을 실감케 한다.
서포 김만중! 이곳에서 밤이면 반짝이는 금산 보리암의 불빛을 보며 그리움과 외로움에 얼마나 소리쳤을까? 그 모습을 떠올리며 돌리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하다. 출생과 성장 그리고 죽음! 서로 부대끼며 어울려 사는 게 삶의 소박한 모습이지만 이념의 선은 예나 지금이나 삶을 좌우하고 있다.
골목 사이 블록담에 부딪히는 발소리가 메아리 친다. 오를 때 보지 못한 마을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13가구가 사는 마을은 울긋불긋 슬레이트 지붕을 조개껍데기처럼 이고 북쪽을 향하고 있다. 보통 집은 남향이지만 노도는 지형학상 남쪽 사면이 급경사라서 마을이 형성되기 어려워 완만한 경사지를 이룬 북쪽 사면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 컬컬한 목을 축일 겸 반장님 댁으로 들어선다.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이곳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불편함이 이만저만 아니라 한다. 그중 화장실 문제가 제일 어렵다 한다. 휴가나 명절이라 하여 자식이나 손자가 와도 빨리 돌아간다고 한다. 사람의 습성상 불편함에서 편리를 추구하기는 쉽지만, 그 반대는 엄청난 감수가 필요 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낀다. 집을 한 바퀴 둘러본다. 텃밭에는 해풍을 맞고 자란 유자가 가을 햇살을 받아 노랗게 짙은 향을 뿜으며 익어가고 있다. 원조란 말을 이런 유자를 보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인터넷도 유선방송도 안 되는 노도 섬! 그리고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오는 우편물, 투표에 참가하려면 배를 타고 나가야 하는 모든 게 불편하지만 그래도 남아있는 삶의 흔적들이 풋풋한 가을바람을 몰고 다독여준다.
물 한 모금을 뒤로 작별의 인사를 나눈다. 오 년 뒤 문학의 섬으로 다시 단장할 때 꼭 한번 찾아오라는 반장님의 말씀을 뒤로 배에 오른다. 힘찬 엔진 소리가 더 할수록 노도는 멀어진다. 남해에 살면서 처음 찾은 그 섬에는 가을의 고독과 그리움이 서숙처럼 갈무리 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