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자(韓非子)>에는 불행과 행복이 같은 문을 사용한다는 ‘화복동문(禍福同門)’의 글이 있습니다. 밤과 낮이 순환되듯, 삶과 죽음도 한 몸의 다른 모습인 것처럼. 고통 없이 이루어지는 행복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인심은 너나없이 행복에 몰입합니다. 100% 행복도 없고 100% 불행도 없습니다. 99% 행복을 이루고도 1%의 불행만을 바라보며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여 불행을 자초하기도 합니다. 살아 있음 그 자체가 이미 기적이고 행복임을 간과하고 사는 것이 불행의 시작이 아닌가 합니다.
단 일회만 살 수 있으니 시간을 가진 자가 행복한 사람입니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시간의 축복을 잊지 않는 것만으로도 행복의 문은 가까이에 있습니다. 어떤 권력과 금력으로도 명예로도 살 수 없는 현재라는 시간의 소중함을 매 순간 깨닫는 사람이라면 굳이 행복이라는 신기루에 매달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100% 순도의 행복을 누릴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많은 것을 누리고자 집착하는 데서 불행의 그림자는 자란다는 것을 잊고 삽니다. 내려놓을 줄 아는 사람이 더 많은 행복을 누리게 되니, 비움의 철학이 뜨는 것입니다.
가족의 소중함 깨닫는 겨울방학이었으면
<공생을 위한 도구>라는 책을 쓴 이반 일리히는 수확 체감의 법칙이라는 고전 경제학의 법칙이 인간의 행위에도 적용된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인간의 활동은 어떤 한계를 넘어서면 효율이 감소하며 나아가서는 역효과를 낸다는 <일리히의 법칙>을 발표하기에 이릅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일정량을 섭취하여 배가 부르고 나면 처음의 그 맛이 아닙니다. 오히려 과식하면 탈이 납니다. 물질이나 권력, 명예를 추구하는 일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이 상식의 수준을 넘어서 파멸에 이른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일리히의 법칙은 세상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한때 일본은 우리나라가 부러워하는 나라였습니다. 경제발전의 속도를 부러워했고 높은 국민소득도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의 모습이 그들의 어두운 모습을 따라가는 것은 아닌지 불안해합니다. 물질적인 채움이 전부가 아니란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가난한 나라들의 행복지수가 높고 많이 웃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가족과 이웃들이 소통하며 마음을 나누는 삶이 행복한 삶임을 알기 시작한 것입니다. 가난한 시절에 고통을 함께 나누던 일상의 행복을 그리워하게 되었습니다.
늦었지만 느림의 철학에 몸을 싣고 시골로 가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가족의 소중함에 눈뜬 사람들이 공동체를 꾸리는 삶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공부와 출세 지향의 삶이 행복의 전제 조건이 아님을 깨닫는 순간은 너무 늦게 찾아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과 눈을 맞추고 밥상머리 대화를 나누는 소박한 행복이 얼마나 귀한 시간이었는지, 그리워 할 때쯤이면 인생의 하강 곡선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같이 있는 동안만큼, 사랑을 나눈 시간에 비례해서 쌓은 추억들이 힘든 날을 견디게 하는 마시멜로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제 교육은 가족의 사랑과 유대를 체험하는 시간을 갖게 하는 원초적인 삶의 소중함을 가르쳐야 할 때입니다. 부모의 욕심이 아닌 사랑과 희망의 대화가 자녀를 행복하게 한다는 오래된 진리를 깨닫고 실천하는 시간의 소중함을 가르쳐야 합니다. 지식의 높이가 지혜의 잣대가 되는 필수조건이 아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약간의 부족함을 겸손함으로 채워 행복의 도를 넘지 않게 하는 자연의 법칙을 배울 때입니다. 그것은 곧 감성교육입니다. 메마른 정서로 사람 대신 컴퓨터와 게임 속에 매몰된 경직된 아이들의 미래가 걱정입니다. 돌아오는 겨울방학에는 가족이나 친구들과 따스한 사랑을 많이 나누는 청소년들이 많았으면 합니다. 사랑은 넘쳐도 좋습니다. 사랑에는 일리히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1년 동안 열심히 살아온 가족끼리 안아주고 다독이며 다음 해를 살아낼 마시멜로를 마음 속에 가득 저장하는 방학이길 빌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