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도에서 외쳐 부른 그리움의 노래
-“남해는 잠들지 않는다”를 읽고-
그리움이 사무치면 바람이 되고 별이 되리라. 금산 아래 한 점 섬 노도는 자개처럼 반짝이는 앵강만을 뒤로 붙박이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다. 열세가구 노도의 집들은 한양을 향한 그리움이 얼마나 사무쳤으면 호구산과 망운산을 바라보는 섬의 북쪽에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섬의 동쪽 응달진 곳엔 파도소리에 애환을 싣고 보리암을 바라보는 세월을 간직한 김만중의 초옥이 있다. 그 초옥 주변엔 해마다 봄소식이 북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하면 그리움을 물들인 동백꽃은 나무에서 땅에서 붉은 빛을 바래며 두 번씩 눈물을 흘린다.
남해에 살면서도 김만중의 일대기를 자세히 알지 못한다. 단순히 한글소설인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쓴 조선 시대 유배객 정도로 알고 있었을 뿐 그의 사람됨과 남해에 유배 온 삼 년 동안의 행적에 대하여서는 딱히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남해는 잠들지 않는다’는 임종욱 작가의 소설은 이런 무관심에 불을 댕겨 궁금증을 시원하게 풀어주었다.
책의 표지에 실린 바닷바람에 몸을 갉혀 먹히며 서안 앞에 대추처럼 마른 모습으로 붓을 든 사람이 바로 김만중이다. 글을 쓰는 사람은 누구나 시인이나 소설가를 꿈꾼다. 하지만 표현력에 차이가 있을 뿐 모든 사람은 제 삶의 행간에 소설가이며 주인공이다. 이 소설을 쓴 임종욱 작가는 한문학자이다. 남해와 전혀 인연이 없는 경북 예천 태생의 사람이 어떻게 김만중의 일생을 연구하고 그 중 3년간 남해의 유배생활을 실감 나는 이야기로 엮었는지 등장인물과 사건을 보며 고개를 숙인다. 이 책의 뒷부분을 보면 작가는 남해와 인연이 있었다. 촌은집, 자암집, 서포집 등 한문으로 된 서적을 번역하는 일을 하면서 남해에 온 유배객들의 생을 알게 되었고 그 중 유독 김만중이 말년에 이곳 남해에서 한 일과 왜 한글로 소설을 썼는지에 의문을 갖고 이 소설을 엮어낸 것이었다.
이 소설의 주된 공간적 배경은 남해이지만 작가의 고향이 경북이라서 그런지 장 선달댁 며느리의 친정인 경북과 인근의 하동, 진주도 언급되고 있다. 소설가들은 앉아서 시공간을 자주 넘나든다. 고(故) 박경리 선생도 하동 평사리를 지나치며 들은 이야기를 주축으로 구한말부터 해방 이후를 배경으로 대하소설 ‘토지’를 강원도 원주에서 완간하였으며 조정래는 벌교를 무대로 삼 년 가까이 해방 후 혼란스런 한국의 근 현대사를 들은 이야기와 현지답사를 근거로 ‘태백산맥’을 완성했다고 한다.
‘남해는 잠들지 않는다’는 어떤 내용인가? 이 소설은 모두 열다섯 신으로 한양에 있는 김만중의 아내와 유배객 김만중 간의 주고받는 편지를 중심으로 각 신의 서두에 편지를 통하여 펼쳐질 이야기의 내용을 간략하게 말하여 읽는 이의 흥미를 불러일으켜 본문으로 흡입을 시키고, 신의 끝에 다시 아내의 편지를 통하여 갈무리한 후, 다음 신에 대한 예고와 궁금증을 파도처럼 일으키게 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관심을 두고 살펴본 것은 남해 토박이가 아닌 작가가 엮어내는 남해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와 한문학자인 김만중이 왜 한글소설을 썼을까? 에 대한 해석이었다.
남해는 보물섬이다. 지천명을 바라보는 시점에 남해는 바다와 산, 들이 어우러진 유자향과 마늘냄새, 시금치의 푸름이 넘실대는 곳이다. 작가는 ‘제2신 남해에서 만난 사람들’에서 ‘바람을 맞으며 흙을 밟고 풀밭에 누워 자는 사람들만 가질 수 있는 풋풋함을 지니고 살고 있는 섬이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흔히 남해 하면 억세고 거칠다는 말을 하지만 김만중의 입을 빌려 남해는 ‘인정 있고, 사람이 살만하며, 신선의 고장으로, 의자 모양으로 편안히 앉기 좋은 곳’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울러 죽방렴과 금산, 대국산성, 각종 특산물도 글의 소재로 이입시키고 있다. 어쩌면 남해에 묻혀 무감각해진 남해사람보다 한층 더 남해의 독특한 풍광과 인심을 소설 속 인물들의 생활상을 통하여 그려내고 있다.
김만중은 왜 말년에 유배지에서 한글소설을 썼을까? 김만중의 어머니에 대한 효성은 지극했다. 김만중은 어머니의 삶을 ‘시간이 지나도 먹물을 빨아들이지도 증발시키지도 않는 계혈석으로 만든 벼루와 같다.’고 하였다. 어머니는 김만중이 쓴 몽환을 읽고서 ‘하룻밤을 새기기에는 글이 너무 짧으며 이웃집 아녀자들은 진서를 읽지 못하니 어찌하리오. 이야기를 좀 더 쉽고 진중하게 엮어보아라.’ 하신다. 또한 ‘주제는 생생하게 살리면서 내용은 알차게 다듬어야 하며 글은 만인의 것이니 누가 독차지해서는 안 된다.’며 언문 글씨의 숨은 진가를 깨우쳐 주고 있다. 그리고 ‘글은 화려한 꾸밈보다는 마음을 바로 담아내도록 깎아내야 하며, 내 마음을 글로 남기지 못하면 후세에 누가 내 마음을 반추하겠는가?’로 글쓰기의 진솔성을 당부하고 있다. 지극히 효성이 강한 김만중이 이런 어머니의 소원을 간과할 리 없었으며, 어머니의 임종도 못한 그의 한이 한글소설로 불타올랐던 것이라 생각한다.
어머니와 더불어 김만중의 집필 관을 바꾸어 준 사람은 유배 가서 죽은 그의 형 김만기이다. 김만기는 김만중에게 글을 너무 남발하는 것에 우려를 나타내었으며, ‘재주를 앞세운 글은 물과 같아 속히 훤히 들여다보여 저작할 맛이 사라진다.’고 글쓰기의 신중함을 말하고 있다. 어쩌면 이 말은 작가의 집필 관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작가가 내세우는 김만중의 사람됨은 어떤 것일까? 그의 사람됨은 소설에 나오는 인물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특히 박태수와 옥진의 도피를 돕는 장면, 정처 없이 떠도는 장 선달 댁 며느리의 누명을 벗기는 지혜, 유배 와서도 호사를 누리는 벼슬아치들의 비판을 통하여 옳다고 생각하면 꼭 행동하는 모습이다. 이는 유배의 섬 남해사람의 성향과 같다고 하겠다.
이 소설의 근간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유배지 남해에 첫 발을 내디딜 때의 옥가락지를 둘러싼 장 선달댁 이야기는 사씨남정기에서, 여성편력증과 낭만에 물든 양설규의 삶은 구운몽을 통해 창조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모든 내용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가족에 대한 사랑으로 귀결되고 있다.
문득 김만중이 쓴 어머니의 행장을 생각하며 십여 년 전에 여읜 나의 어머니를 떠올려 본다. 나의 어머니는 열여덟에 시집와서 평생을 길쌈과 농사일로 고된 몸을 건사하다 한 세상 못 보고 풍년초 연기에 한을 싣고 푸른 하늘 저편에 계신다. 어릴 적 길쌈을 하면서 내가 글을 알아 삶을 쓴다면 수십 권이 넘을 것이란 하소연이 귀에 아른거린다. 하지만 김만중은 어머니의 행장을 쓰고 구운몽도 지었지만, 정작 나는 어머니를 위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음에 고개를 숙일 뿐이다.
모든 이야기는 클라이맥스가 있다. 박태수와 옥진의 탈출, 여성편력과 낭만에 물든 양설규의 죽음, 장 선달댁 며느리 바로 세우기의 이야기가 반전에 반전을 더하여 읽은 이의 흥미를 더하고 있다.
김만중의 초옥이 있는 노도! 해풍이 살을 갉아 먹고 그리움의 사무침은 동백으로 피어 늦겨울과 봄을 붉게 물들이는 섬. 파도소리 바람 소리가 휘파람을 불고 동박새 지저귐에 그리움이 가슴을 난도질하는 곳. 바다 건너 삼남 제일인 금산과 보리암 전의 해수 관음상은 김만중의 마음을 알고 있을까?
2012년 가을! 노도를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읽어본 이 책은 김만중의 삶과 아픔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 가을 노도는 그리움의 흔적이 남아있다. 겨울을 지나 봄을 예견하는 흔적은 한 점 섬 눈물에 아롱져 선홍빛 같은 그리움이 몽우리를 맺어 꽃을 피워낼 준비를 하고 있다.
유배객 김만중! ‘오늘도 초옥 아래 바닷가에서 바라보는 파도는 대궐도 초막도 그리운 사람일 얼굴일 때가 많았다.’ 그가 불러보고 싶고 함께 하고 싶은 것은 사랑하는 가족이었다. 짧은 가을 낮 초옥 옆 샘가엔 세월의 흐느낌이 낙엽으로 앉아 물길만 가로막고, 잠시 몸을 뉘었던 유허엔 해풍만 빛바랜 풀잎을 흔들며 정지된 시간을 응시하게 한다.
남해는 항상 깨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