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과 더불어 새해를 맞이하는 세시풍속이 정월대보름이다. 이때를 전후하여 풍년기원고사, 마을안녕기원제, 달집태우기, 지신밟기, 쥐불놀이, 줄다리기, 연날리기 등 다양한 행사가 지역별로 개최된다.
정월대보름 행사는 음식을 푸짐하게 장만하여 이웃과 나누어 먹는 작은보름부터 시작된다. 해충의 피해를 줄이고자 논밭두렁의 잡초와 잔디를 태우는 쥐불놀이, 1천년 간 이어져 내려오는 고싸움놀이, 큰 줄을 당기며 화합과 풍년 농사를 기원하는 줄다리기, 지신(地神)을 밟아 달램으로써 한 해의 안녕과 복덕을 기원하는 지신밟기 등 올해도 액운을 쫓고 한 해의 안녕을 기원하는 행사가 풍성하게 열렸다.
보름맞이 행사는 대부분 여러 사람과 어울리며 정을 나눈다. 예부터 ‘설은 나가서 쇠어도 보름은 집에서 쇠어야 한다.′고 했다. 나이 먹을수록 더 소중한 곳이 고향이다. 객지에 나가 사는 사람들이 고향의 정을 느끼며 스스럼없이 어울리기에도 좋다.
세시풍속을 마을 전통으로 이어가고 있는 내 고향 ′소래울′. 소래울은 청주시 흥덕구 내곡동의 옛 지명이다. 소래울은 좁은 골짜기로 해석되고, 마을이 안쪽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어 ′안골′로도 불린다. 디지털청주문화대전에 의하면 '안골'은 안(內)과 골(谷)이 결합한 이름으로 ′내곡′은 ′안골′이 한자화한 지명이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세상이다. 하지만 소래울에서는 세월이 느리게 간다. 그래서 기억속의 풍경처럼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낮은 산등성이를 경계로 큰소래울과 작은소래울로 나뉜다. 그중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40여 호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소래울이다. 마을에 들어서면 들판 끝과 마을 앞으로 중부고속도로와 충북선철도가 지나고, 마을 뒤편으로 자동차전용도로 공사가 진행 중이다.
정월대보름을 하루 앞둔 2월 23일, 작은소래울 사람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달집을 태우며 한해의 소원을 빌었다. 달집태우기 행사 전후에 마을사람들의 흥을 돋우는 게 풍물놀이다. 고향 사람들이 풍물놀이를 즐기는 이유가 있다.
내 고향은 행정구역상으로 청주시에 위치하지만 시내 변두리의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농촌에서 힘든 일을 할 때 서로 협동하며 일의 능률을 올리고, 명절 때 같이 어울리며 흥을 돋우기 위해 풍물을 연주했다. 고향 사람들은 어린 시절부터 풍물을 보고 들으면서 커와 풍물놀이에 익숙하다. 우리 고향의 풍물놀이와 두레가 전국에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충북공고 풍물반이 2007년 10월 경남 사천시 삼천포대교 공원에서 열린 제14회 전국청소년민속예술제에서 ′청주 소래울 풍장′으로 금상, 2009년9월 서울 국립국악원에서 열린 제16회 전국청소년민속예술제에서 ′청주 소래울 두레놀이′로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청주 소래울 두레놀이′는 심사위원들로부터 선조들의 삶의 모습을 재현하고 전통문화를 전승한 탁월한 민속예술이라고 높이 평가받았다.
사람 사는 곳에는 사람 냄새가 나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찾아온다. 아래위를 챙기면서 아낌없이 주고받는 내 고향 '소래울'의 보름 행사 풍경에서 따뜻한 정과 훈훈한 인간미가 느껴진다.
고향은 마음을 연결해 주는 끈이다. 제 살길 바쁜 세상 이런 날 아니면 얼굴 보기도 어렵다. 시간이 되자 고향 떠난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고향에서 명절을 쇠기에 설에 만났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몇몇은 오랜만에 얼굴을 본다. 고향 사람은 자주 만나도 늘 반갑다. 서로들 인사를 나누고 임시로 마련한 자리에 앉는다.
우리나라의 세시풍속은 놀이만큼이나 먹거리가 풍부하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배가 불러야 즐겁다. 돼지머리를 삶고, 동태찌개를 끓이고, 삼겹살을 굽고... 모리미를 섞은 통막걸리에 안주 걱정 없으니 고향의 선후배간에 정을 가득 담은 술잔도 자주 돌린다. 작은보름이기도 하고 여럿이 먹으니 각종 나물을 넣어 비빈 비빔밥 맛이 최고다.
먹었으니 밥값은 해야 할 것 아닌가. 불쏘시개가 될 짚단 위에 장작을 쌓고 둘레에 대나무를 세운 후 ‘액막이·풍년기원 달집태우기 내곡동 2013. 2. 13’이 써있는 플래카드를 두르니 충북선 철길 옆 논바닥에 뚝딱 달집이 만들어졌다. 땀을 흘리며 여럿이 힘을 합한 결과물이라 모두가 흐뭇하다.
달집을 세운 흥을 풍물놀이와 지신밟기로 풀어야 한다. 지신밟기는 지신에게 고사와 풍물을 울리며 축복을 비는 세시풍속이다. 앞잡이와 풍물패는 물론 구경꾼들까지 마을 곳곳을 돌며 달집태우기 행사를 알리니 우리 마을은 제대로 지신밟기를 하는 셈이다.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고 풍물패를 기다리는 집도 있다. 힘이 났으니 내곡초등학교, 강서2동사무소, 서청주농협내곡지점이 있는 큰소래울까지 한 바퀴 돌며 지신밟기를 이어간다.
달집태우기는 우리 고유의 민속신앙이자 함께 어울리는 놀이문화다. 그래서 옳고 그름을 따질 필요가 없다. 그냥 예전에 했던 방식대로 같이 어울리며 ‘하하호호’ 즐기면 된다.
소망기원제를 올릴 음식도 정성껏 준비했다. 상을 차린 후 마을 대표가 먼저 술을 따라 올리며 행사가 이뤄짐을 알린다. ‘계사년 2월 23일 충북 청주시 흥덕구 내곡동 동민일동은 정성들여 음식을 준비하고 하늘과 땅과 인간과 자연을 통할하고 지배하는 신명님께 제를 올리오니 ~ 생략 ~’ 모두 무릎을 꿇고 엄숙하게 유세차로 시작되는 독축(축문 낭독)을 듣는다. 연장자부터 차례로 고사상에 차려진 돼지머리에 성의껏 준비한 고삿돈을 꽂은 후 술을 올리고 절을 한다.
축문은 마을 공동체에서 제의를 행하며 신에게 전달할 자신들의 의지를 문자로 기술한 것이고, 소지는 부정을 없애고 소원을 빌기 위하여 흰 종이를 태워 공중으로 올리는 일이다. 예부터 신성성을 지닌 종이를 불사르며 기원하는 전통이 있다. 그러면서 축문을 태워 하늘높이 올라가면 무탈한 한해가 된다고 믿었다.
행사장인 느티나무 보호수(청주 제18호) 아래 공터는 행사를 격려하는 마을 어른들이 자리를 지킨다. 평화로운 작은 소래울 앞으로 기차가 달리고 뒤편 중부고속도로 위로는 석양이 멋지다. 마을 사람들이 한 해의 소망을 담은 소원지도 달집을 두른 새끼에 꽂았다. 달집은 원래 달이 뜨는 순간 달맞이를 하며 태워야 한다. 해가 넘어가면서 마을 사람들이 하나, 둘 달집 앞으로 모여든다. 달집 둘레를 돌며 풍물놀이로 흥을 돋우다 달이 떠오르는 순간 “달불이야!”라고 외치면 주민 몇 명이서 달집에 불을 붙인다.
달집에 불이 붙어 불꽃이 하늘 높이 피어오르자 예서제서 박수 소리와 환호성이 들려온다. 잡귀잡신과 액운이 모두 물러가고 참가한 사람들 모두에게 만복이 깃들만큼 ‘타닥~탁~’ 대나무가 불에 타면서 터지는 소리가 크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게 불구경과 싸움구경이라고 달집 주위에 모인 아이나 어른이나 모두가 싱글벙글이다. 불길이 치솟는 달집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기는 사람들도 많다. 하늘에서 우리 고향의 달집태우기를 내려다보며 밝게 웃는 달님의 모습이 정겹다.
‘어절씨구~ 저절씨구~’. 저절로 흥이 나는데 장단이 뭐 그리 중요한가. 사라지는 불빛을 아쉬워하며 오랫동안 풍물놀이가 이어졌다. 고향에 오는 게 그냥 좋고, 고향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그냥 즐거우면 된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그냥 여러 사람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며 불앞에서 어깨춤을 춘다.
달집태우기 행사를 하는 동안 모두의 마음이 하나였다. 모두가 달집의 불꽃이 꺼지는 걸 아쉬워하며 석별의 정을 나눴다. 더 멋진 내년을 기약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고향 사람들 모두 건강하고 뜻하는 일 다 이루게 해달라는 소원을 보름달에게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