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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흔적

『산 너머 남촌(南村)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南)으로 오네.// 꽃 피는 사월(四月)이면 진달래 향기/ 밀 익은 오월(五月)이면 보리 내음새.// 어느 것 한 가진들 실어 안 오리./ 남촌(南村)서 남풍(南風) 불 제 나는 좋데나.』이 글귀는 파인 김동환이 지은 ‘산 너머 남촌에는’시 일부분이다. 이 시를 읽으면 부드러운 봄의 전령이 이마를 입맞춤하고 꿈길 속을 거닐게 하는 오감이 융합되는 느낌을 준다.

우수가 지났다. 겨울의 끝자락에서 산 너머 남촌에 사는 봄의 여신이 생동감으로 잿빛 겨울 흔적을 밀어내고 파스텔톤의 봄을 연하게 칠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겨울과 봄의 흔적이 교차하는 요즈음 떠남과 새로운 만남의 소용돌이가 만들어지고 있다. 바로 이월 말과 삼월 초에 있는 졸업과 입학, 새로운 근무지를 향하는 작은 흔적이다.

떠남이 있는 자리는 항상 흔적이 있다. 세월의 흔적은 까만 머리카락 속에 발견되는 흰 머리카락이며 새로운 비상을 향해 떠난 둥지에는 성장시켜주고 생활을 이어온 깃털이 흔적으로 남는다. 이 지구 상에 생명을 가진 것들은 그 흔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남은 흔적들이 빛이 나고 본보기가 되는 것들이라면 떠남의 시점에 얼마나 좋을까? 매일 성찰과 반성하는 삶을 살았다면 좋은 흔적의 자화상이 아름다운 마무리를 할 것인데 그렇지 못한 소유와 욕심에 이끌린 삶은 어두운 그림자를 남기고 있다.

문득 물새를 떠올려본다. 물에서 헤엄치다 날아간 그들의 흔적은 잠시의 파동 다음에 언제 있었냐 하듯 바람의 흔적만 잔주름을 만든다. 이 사유의 여운은 십여 년 전 교단에 있다 퇴임하면서 남기신 교직의 한 원로께서 남기신 말씀이다. 떠난 자리와 날아간 자리는 물새와 같아야 한다고!

흔적과 군더더기 그리고 삶의 편린. 이런 것들은 떠남의 순간과 뒤안길에서 자주 보게 된다. 떠남은 개인으로서는 근무지를 옮기는 것, 가정으로는 이사를, 국가적으로는 정권이 교체되는 것도 해당한다. 떠나게 되면 흔적이 남는다. 이를 경우 대부분 아름다운 흔적보다는 거친 흔적들이 눈을 크게 뜨려고 한다. 그래서 떠나는 사람들은 그 빌미를 잡히지 않으려고 자신의 흔적들을 지우려고 애쓰는 경우가 허다하다.

지난달 이었다. 오 년에 한 번 정도 도배하는 게 좋다 하여 서재를 도배하려고 세간들을 옮겨야 했다. 서너 평 남짓한 곳에서 쏟아져 나온 책이며 잡동사니들이 거실을 가득 채웠다. 조그만 공간에 지금까지 숨죽인 물건들이 그동안 손에서 멀어진 것을 시위하는 듯했다. 도배를 마친 후 정리를 하며 이 물건 중에 한 때는 관심과 사랑을 받은 것도 있었지만, 지금은 뒤로 앉아 먼지를 뒤집어 쓴 모습이 우리 삶과 비슷했다. 그래도 버리지 못하고 아쉬워 다시 보관하려 하니 소유와 집착의 욕망은 힘든 노동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십 년 가까이 몸담았던 근무지를 옮기는 시점에 쏟아져 나온 잡동사니들이 행적을 반추하게 만들고 있다. 버릴 것을 분류하다가도 앞으로 마땅히 소용될 것도 아닌데 다시 가져갈 물건으로 선택하다 보니 선별의 가늠이 모호해진다. 머문 시간이 길수록 흔적들은 발목을 세게 붙드는 법 가져가고 싶은 물건들이 많아 화물차를 불러야 할 형국인데 짧은 기간 머물다 떠나는 다른 분들은 달랑 상자 몇 개와 외장용 하드디스크뿐이다. 이런 형국을 보니 떠남의 시점에 발동하는 소유의 욕심은 아름다운 마무리를 거부하게 한다.

떠난 뒤에는 무수한 사연이 그 동안의 행적을 쫓아 발효한다. 때로는 단내를 내기도 하고 쓴 맛으로 있다가 고린내를 내기도 한다. 그러나 성자가 아닌 이상 보통 사람이 남긴 대부분은 쓴 맛으로 발효하여 고린내로 회자하기 일쑤다. 과연 그동안 내가 머물고 간 흔적은 어떻게 발효가 될지 궁금해진다. 계절의 교차점에서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에 나오는 마법의 거울에 물어보고 싶다.

누가 말했다. ‘진정 아름다운 사람은 뒷모습이 아름다움 사람이며 그 사람은 내면이 도타운 사람이다. 그리고 가만히 있어도 불러보고 싶은 사람, 뒷모습이 참해서 돌려보고 싶은 사람, 못 보면 안타까워 옥 난간을 휘돌아가고픈 사람’이라고 했다. 아름다운 사람은 머무는 동안 그 길을 잘 닦은 사람일 것이다.

이 시점에서 비록 모두가 아름다운 사람은 아니지만, 꼭 알아야 될 것이 있다. 학문이나 예술에는 스승이 있지만, 아름다운 흔적의 매력은 언제나 일상을 아름답게 가꾸는 자신의 흔적이 밑거름 된다는 것을 알고 향기나는 일상을 위해 매진해야 한다. 그러면 산 너머 남촌에서 불어오는 남풍처럼 언제나 달콤한 향기가 그 흔적을 음미하게 해 줄 것이다. 따스함과 꽃샘추위가 반복될 삼월. 마법의 거울 속에 나의 흔적은 얼마나 향기가 나는지 물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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