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언제부터 있었을까? 모든 방향으로 나 있는 길. 그것을 선택하고 걷는 것은 오직 자신의 몫이다. 하얀 밤꽃이 흐드러지게 핀 유월 초순. 여름의 시작인 장마를 코앞에 두고 바래길을 걷는다. 출발지 상주은모래비치 솔숲엔 고운 선율의 동요가 솔 향기를 타고 흐르고 출발을 기다리는 얼굴에는 기다림이 편지를 쓰고 있다.
이 길을 언제 누가 걸었을까? 피아노 소리를 뒤로 같은 코스를 걷는 사람들. 타인과 타인이 만났으면서도 목적지가 같다는 까닭으로 같이 걸음을 옮긴다. 수산종묘 배양장으로 가는 언덕길을 오른다. 거리가 주는 미학, 상주은모래비치의 곡선이 더 아름답다.
포장도로를 벗어나자 본격적인 산길 걷기가 시작된다. 수풀로 우거진 산길엔 청미래 열매, 산새 소리, 파도소리가 오감을 파고든다. 구불구불하고 때로는 오르막도 되며 너무 가팔라 밧줄을 잡고 올라가는 길이 이어진다. 다양한 길의 형태가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형태가 아닌가 한다.
바다를 끼고 걷는 길은 참 여유롭다. 느리게 움직이며 걷는 일은 빠른 생활 습성에 젖어든 현대인에게 꼭 필요한 일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느림 자체가 생각을 더 깊게 하고 일상을 돌아보게 하기 때문이다.
인적 드문 산속 무덤가를 지나 파도소리가 더 가까워지는 가슴이 트이는 곳에 이른다. 아찔한 현기증, 시루떡이 솟아올라 떨어져 나간 듯 ‘슈퍼맨 리턴즈’라는 영화 중 바다 밑에서 솟아올라 생긴 주상절리 단층을 가진 구운몽길의 비경인 비룡계곡에 이른다. 깍아지른 절벽은 더 가까이 접근을 허락하지 않고 이름 모를 풀꽃만 해풍에 흔들거린다.
길은 언제나 이어진다. 비룡계곡을 돌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오르자 다시 넓은 포장길이 나온다. 한 줄로 걸었던 사람들은 어깨를 나란히 하며 걷는다.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누며 서로의 땀도 닦아주는 친구 같기도 부부 같기도 한 사람들.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얼굴은 환하기만 하다.
간간이 걷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춘다. 길 가장자리 풀숲 속에 익은 산딸기를 따 먹기도 한다. 아마 산딸기를 베어 물면서 유년의 기억을 반추하고 있을 것이다.
대량마을로 접어드는 내리막길에는 가천마을, 설흘산, 앵강만과 노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날씨가 맑았더라면 청정한 남해의 모습이 선명하게 들어올 것인데 아쉽지만, 가을의 구운몽길을 약속해 본다.
대량마을 선착장에서 구운몽길 확인을 받고 마을안길을 거슬러 오른다. 촘촘히 들어선 다랑논에 잡풀만 무성하고 돌로 쌓은 밭 언덕엔 섬 기린초가 노란 웃음으로 반가움을 전한다. 대량마을! 하루에 몇 번 오지 않는 버스가 주요 교통수단이었던 이십 여년 전, 첫 부임지를 이곳에 받은 어느 초임 교사가 외로움에 울기도 많이 했다는 곳이다. 시간이 정지된듯한 마을을 약간 벗어나자 한 줄기 바람이 언덕을 타고 넘는다. 그 바람에 군락을 이루며 자라는 모시풀이 회색 웃음을 풀어놓는다.
다시 두 갈래 길이 나타난다. 항상 낯선 길을 가다 갈림길이 있을 때 선택을 두고 갈등을 겪는다. 요행이 코스 안내자의 인도로 다시 나오는 길로 방향을 잡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출발할 때보다 사람 수도 적어지고 걸음도 느려지는 것을 느낀다. 한적함을 느끼며 돌아오는 길. 왼쪽으로 산을 끼고 오른쪽으로 바다를 보며 걷는 길, 삘기는 하얗게 꽃을 피워 무덤을 덮고 발끝에 걸리는 찔레꽃은 하얀 천에 금실로 자수를 놓은 것 같다.
구운몽길! 지게 지고 땔감이나 소꼴을 장만하러 갔거나 바닷가 비렁에 해산물을 채취하러 갈 때 이용하던 길이다. 그때 그 길을 걸었던 사람들은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 걸었을 것이다.
혼자서 걷는 길이 지난 일들을 피워 올려 감기 시작한다. 약간의 갈증과 허기를 느끼며 걷는 길. 물 한 모금의 소중함을 다시 느끼는 반성의 길. 오랜만에 돌아보는 시간이다.
도착을 얼마 앞둔 은모래비치의 모래톱에는 갈매기가 날개를 쉬고 있다. 평온해 보인다. 구운몽길은 여러 갈림길을 선택하게 하였고 다시 이곳으로 오게 하였다. 문득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는 길’을 떠올려 본다. ‘숲 속엔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길은 우리의 인생과 같다. 남이 간 길, 미리 선택된 편안한 길을 가기보다는 가지 않는 길을 선택하여 가는 것은 인내와 고통이 필요하다. 하지만 돌아보면 힘든 길은 더 기억에 남는다. 그런 면에서 구운몽길은 남해사람들의 많은 애환과 슬픔, 인내를 생각하게 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