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낮 폭염은 맹위를 떨치지만 해가 지고 나면 조금씩 가을을 느낀다. 잠자기 전에 방문을 닫고 창문을 닫는다. 홑이불을 끌어 당겨 배를 덮고 잔다. 새벽에는 한기를 느낀다. 이제 가을이 오고 있는 것이다.
우리집 아파트 베란다 텃밭. 고추 모종 10개와 토마토 모종 5개, 그리고 나팔꽃이 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있다. 지난 어린이날 심었으니 석 달 정도 자란 것이다. 상추 가꾸기는 실패하였으나 어린 고추는 아침식사 쌈장에 찍어 먹으니 비타민 공급원이 된다. 방울 토마토는 식후 후식용이다.
아내는 무성하게 자란 나팔꽃 덩굴을 보며 한 마디 한다. "왜, 꽃이 안 피지?" 아파트 베란다 창문을 덮을 정도로 덩굴이 위로 쭉쭉 자라는데 꽃을 볼 수 없기에 하는 말이다. 그러던 나팔꽃이 드디어 보라색꽃 두 송이를 피었다. 이제 나팔꽃도 가을이 다가옴을 느끼는지 모르겠다.
화분에 심은 고추. 두 개가 빨갛게 익었다. 하나는 길게 뻗은 상태에서 익었는데 하나는 어른 손톱만한 것이 빨갛게 익어 간다. 잘 자라 익은 것은 음식재료로 쓸 수 있건만 작은 것은 그냥 관상용이다. 식물이 자라는데 햇빛은 필수인가 보다. 베란다 밖으로 줄기를 뻗은 것이 붉게 익는다.
방울 토마토 다섯 그루. 네 개는 황금토마토이고 하나는 붉은색 열매가 맺는다. 워낙 자람이 빨라 기둥을 세워 주었다. 그러나 금방 기둥보다 크게 자란다. 순치기의 효과가 있었을까? 옆으로 자라는 것보다는 위로 줄기를 뻗으면서 노란꽃을 피운다.
베란다 바닥 타일을 보니 가을 흔적이 보인다. 노란색으로 변한 나팔꽃잎, 고추잎이 말라 오그라 붙은 것, 가을이 왔음을 알리는 것이다. 고추 모종 아랫잎도 점차 노란색을 띠어간다. 우리네 인생이나 소설을 보면 기승전결이 있다. 식물도 마찬가지다. 지금 고추와 토마토는 마지막 단계를 향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아파트 베란다 농사를 지으면서 가장 좋았던 점은 늘 초록을 가까이 할 수 있다는 것. 기상과 동시에 거실에서 내다보면 앞동 건물보다 초록이 먼저 보인다. 식물을 자람을 지켜보는 것은 인성에도 도움이 된다. 식물의 변화를 보면서 심성이 가다듬어 진다.
처음엔 열매에 욕심이 있었으나 지금 그것은 부차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물론 무농약으로 가꾸니 천연 비타민 공급원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밭에서 가꾸는 고추에는 탄저병이 찾아온다고 하나 다행히 우리집 고추는 멀쩡하다. 내년에도 토마토와 고추는 계속 가꾸어 보리라 마음 먹는다.
아파트 베란다 텃밭에서 식물을 가꾸면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것이 큰 소득이다. 봄에 심은 모종이 무럭무럭 자라 여름엔 꽃을 피우며 작은 숲을 이룬다. 가을이 되면 열매를 맺는다. 주인이 열매를 따가도 부지런히 또 맺는다. 아낌없이 준다. 이게 바로 자연이다.
아내는 보랏빛 나팔꽃과 붉게 익은 고추를 스마트폰에 담는다. 기록으로 남기려는 것이다. "여보 그것, 내 이메일로 보내! 그래야 기사 하나 쓰지." 참 좋은 세상이다. 텃밭이 없어도 아파트 베란다에서 화분으로 도시 농사를 짓고. 거기서 가을을 느끼고 기록으로 남겨 부부가 공유를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