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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1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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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방

어떤추석

축제의 끝은 황량한 것일까? 맑고 투명한 대기를 가을 햇살이 반직선으로 지나간다. 햇볕은 따갑지만, 그늘은 서늘함을 머금고 있다. 여느 때 같으면 발소리로 가득할 추석날인데 썰렁하기 짝이 없다. 긴 골목을 들어서자 채마밭가에 거북등처럼 갈라진 껍질에 이끼를 두른 늙은 단감나무 한그루가 힘없이 서 있다. 벌레에게 먹힌 상처투성이 잎과 몇 개뿐인 가지는 긴 시간을 말하고 있다. 언제 장에서 사왔을까? 가을배추 모종이 대문간 리어카 그늘에서 힘없이 이식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어디에 심어서 김장 담가 자식들에게 나누어 줄 생각이었나 본다.

장독대 옆 대봉감나무도 허전한 추석을 맞고 있다. 초가에서 슬레이트로 개량 기와지붕으로 바뀌는 수십 년의 생활을 말없이 지켜본 산 증인이다. 이제 나무도 늙었는지 올 여름의 불볕더위에 지쳤는지 미처 익기도 전에 떨어진 감들은 시멘트 바닥에 으깨어져 시큼한 냄새와 가을 파리만 불러 모으고 있다.

추석날 이른 아침이다. 둘째 녀석은 차례와 성묘가 끝나면 외가에 갈 거라고 기대를 모은다. 그런데 울리는 전화소리! 수화기를 든 아내의 얼굴이 변하기 시작한다. 전화기 너머 들리는 목소리는 아이의 외삼촌이다. 팔순을 바라보는 외할머니께서 추석날 아침 쓰러져 병원 중환자실에 계신다는 소식이다. 노인들에게 오는 뇌혈관계 질환인 뇌경색이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긴 연휴 기간 병원도 쉬는데 응급실을 찾아 동분서주했을 모습이 눈에 안 봐도 흔하다.

마음은 조급한데 도로사정은 형편을 알아주지 못한다. 상행선, 하행선 할 것 없이 차들로 빼곡하다. 가는 내내 아내는 말없이 눈시울만 적신다. 사람 사는 세상! 서로 다른 것 같아도 한 겹 더 벗겨 보면 그 속사정은 행불행의 연속이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삼십 분 주어지는 면회시간 동안 아내는 내내 울기만 한다. 희망을 주는 어떤 메시지도 없이 돌아서는 발길은 무겁기만 하다.

아침에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경황이나 있었을까? 집안은 어떻게 되어있을까? 처가로 향하는 길, 아내의 얼굴엔 잘한 일 보다 잘못한 일들이 주마등처럼 명암을 이루며 지나간다. 그렇게 무리하지 말고 일 좀 하지 말하고 했는데 안타까움의 푸념이 바퀴 소리에 흩어진다.

평소 인적 드물고 소 울음 바람 소리만 가득한 마을엔 명절이라 외지에 나갔던 자식들의 차량이 드문드문 보이고 아이들 모습도 보인다. 한적한 시골 마을에 오랜만에 사람냄새가 난다.

슬레이트 지붕 위에 덧씌운 개량 기와지붕이 천연덕스럽다. 부엌문을 열자 어수선한 모습이 아침의 폭풍우를 연상케 한다. 널브러진 옷가지, 그릇그릇 담긴 명절음식, 마당 한쪽에 갈무리되는 벌레 먹은 밤, 눈에 띄는 곳마다 장모님의 손끝이 닿은 약초꾸러미와 봉지들이 시장 난전을 연상케 한다. 대충 정리를 하고 고방을 연다. 그 연세에 편안히 계시면 될 것인데 자식들 오면 줄 것이라고 많이도 준비하셨다. “문디 할마씨 누가 이런 것 준비하라고 했나? 그런다고 어느 자식이 알아주나, 임자나 잘 먹고 편히 계시면 될 것이제!” 울음과 한탄 섞인 아내의 푸념이 집안 이곳저곳을 푸석거린다.

무슨 추석 날씨는 이렇게 좋을까? 날씨 타령하며 집안을 수습하는 동안 잠시 마을 둘레를 걷는다. 가을바람은 서늘하지만, 늦더위는 여전하다. 두런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농기계 보관창고 옆 그늘에 할아버지 세 분이 이야기를 나누고 계신다. 연신 눈길은 처음 보는 나그네와 달음박질하는 아이들에게 머문다. 이런 마을에 외지사람과 아이들 본지가 얼마나 오래되었을까? 명절 지나면 또다시 고요함 속으로 젖어들 것이다.

올해는 밤이 흉작이라고 한다. 언제나 추석에 찾아뵈면 장모님은 가시에 찔려가며 주운 밤을 손주들 삶아 주라며 싸주셨다. 하지만 올해는 밤 농사가 시원찮다는 소리를 일전에 들었는데 추석이 빨리 들어 그랬는지 길섶에 떨어진 밤은 전부 벌레를 먹은 것뿐이다.

누가 늙고 병들기를 좋아할까?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생로병사의 사슬을 벗어날 수 없다. 집안을 정리하고 일어서려고 하는데 처남댁이 참기름병을 내민다. 장모님께서 추석 전 수확한 깨와 모자란 깨는 더 사서 보태 오 남매에게 한 병씩 줄 것이라고 준비한 몫이라 한다. “누가 이것 준비하라고 했나 문디 할마씨.” 또 한 번 아내의 울음 섞인 푸념이 가을 하늘에 흩어진다.

돌아오는 차 속에서 오늘은 후각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지 고소한 참기름 냄새를 맡을 수 없다. 대신 붉게 물들어 노을진 해넘이와 시멘트 바닥에 떨어져 뒹구는 감들의 으깨진 시큼한 냄새 만 하루의 기억을 더듬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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