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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방

원천 마을의 가을

가을이 되면 종종 혼자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시월중순 아침의 원천마을 바닷가. 앵강만 너머 호구산 정상은 가을 색이 묻어난다. 며칠 반짝 차가운 날씨로 대기가 불안정해서 인지 바람에 일렁이는 잔물결이 방파제에 부서진다.

아침 8시를 지난 수협원천위판장 방파제 안쪽에 방금 닻을 내린 고깃배들이 물결에 심하게 요동친다. 평소 같으면 잘 보이지 않던 갈매기의 울음소리가 시퍼런 하늘을 가른다. 방파제 덕분에 앵강만 깊숙이 걸음을 옮겨본다. 그 안쪽에는 정박한 뱃전에 남정네들이 앉아 아침을 먹고 있다. 흔들림도 개의치 않고 몇 가지 안 되는 반찬에 삶을 나누는 모습이 풋풋하다.

시간의 기다림은 변화를 가져온다. 금산 줄기 위로 솟아오른 아침 햇살이 양털 구름 사이에서 푸른 하늘을 빛나게 하고 바다를 조명한다. 햇살 따라 푸른 잉크가 에메랄드빛 바다를 한 붓 그린 것 같다.

가을 그 결실의 끝자락 시월의 하루는 참 짧다. 마늘을 심고 비닐을 씌우고 시금치를 뿌리고 싹을 틔운 마늘밭에 비닐을 덮고 구멍을 뚫는 촌부의 손끝은 바쁘기만 하다. 찬 바람이 옷깃을 한 번 더 스칠 때마다 자꾸 고개를 들어 서산으로 떨어지는 해를 살펴본다. 이렇게 땅의 가을은 바다에도 찾아온다. 바다색이 짙은 가을 하늘을 닮아 갈 때면 어부의 손도 바빠진다.

약간 높은 물결이지만 하얀 물거품을 일으키며 엔진 소리를 높여 두어 척의 배가 선착장으로 들어온다. 이미 들어온 고깃배는 물 칸을 열고 경매준비를 한다. 바닷물로 뱃전을 씻는 어부에게 몇 시에 바다에 나갔느냐고 묻자 새벽 서너 시에 어장을 돌아보고 경매시간에 맞추어 들어왔다고 한다. 바람결에 라면 냄새가 나는 것을 보니 막 아침 먹을 준비를 하는 모양이다. 해풍에 그은 얼굴에 어부의 삶이 드러난다.

숙인 허리를 보며 요즘 무엇이 많이 잡혀요 묻자 이상하게 지난해 이맘때 잡히는 고기는 별로 없고 철없는 문어와 산 새우가 많고 횟감으로 쓸만한 고기는 적다고 한다. 아무래도 수온의 변화 때문에 아닌가 하며 걱정스럼을 내 비춘다. 한술 더 생뚱스럽게 일본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의 방사능 오염수 누출로 인한 남해 수산물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묻자 없어서 못 잡고 못 판다고 한다. 그리 넓지 않은 경매장에는 바닷물을 담은 그릇들이 즐비하다. 곧 경매가 이루어질 모양이다. 털털한 남해 말투가 오가며 준비를 하는 모습이 정겹다. 물정 모르는 나그네가 말끔히 정리한 배에 다가가 언제 바다에 나가자 묻자 “와요” 한다. 말쑥한 옷차림에 사진기를 든 모습이 아무래도 살갑지 않았는가 본다.

이미 들어온 배의 물칸에서 고기를 내리는 어부와 외지 말을 사용하는 경매사인 듯한 사람의 대화가 정겹다. “아이고 연세도 많은 양반이 대단하십니다.” 저 배 주인은 올해 연세가 일흔여섯이라고 한다. 정말 믿기지 않은 모습이다. 여기 바다에 나가는 사람 중 칠십을 넘기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한다. 그래도 저렇게 힘을 쓰는 것은 공기 좋고 물 좋고 마음 편해서 그렇고 아무래도 농사일보다 조금 수월하다고 한다. 경매장으로 어물을 내리는 모습을 보고 어르신 정말 젊어 보이세요 하자 웃음을 짓는다. 또 한줄기 세찬 바람이 지나간다. 갈매기 울음소리가 더 시끄러워진다. 들어오는 배가 많아지자 먹을 것이 있을까 더 살피는 모양이다.

바다와 인접한 남해의 가을은 정겨운 듯하면서도 시리다. 바람 없고 맑은 날이면 따스한 남국의 한가운데 있는 듯하고 북쪽에서 내려온 한기가 힘을 높이면 바다도 사나워지고 찬바람을 억새를 흔들며 이산 저산을 넘는다. 도로변을 따라 늘어선 벚나무의 물듦이 더해지고 몇 장 남기지 않는 감나무의 감이 붉어진다. 아직 푸른빛이 남은 모과는 결실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 이제 막 마늘과 시금치를 심은 논밭은 황톳빛이고 가을걷이를 끝낸 논은 벼 그루터기에서 돋아난 새순으로 파릇파릇하다. 하루가 다르게 가을은 깊어만가고 해는 짧아진다. 아쉬운 가을 하루를 보며 릴케의 ‘가을날’을 떠올려 본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십시오. 들에다 많은 바람을 놓으십시오. 마지막 과실을 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시켜,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십시오…….

가을날 가는 시간이 아쉬워진다. 바다에서도 땅에서도 깊어지는 가을을 함께하며 삶을 일구는 남해 사람들. 그 여문 남해의 가을이 앵강만을 낀 원천마을에 깊어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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