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이는 오늘도 아파트 문을 저 스스로 열고 나가겠다고 떼를 쓴다. 발뒤꿈치를 들고 까치발로 서야만 간신히 도어록 손잡이에 닿는다. 무심코 내가 아파트 문을 열게 되면 보통 앙탈을 부리는 것이 아니다. 문을 열고 나가게 되면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앙증맞은 발을 올려놓고 신발 앞쪽에 선을 긋는다. 그것도 양쪽 신발을 교대로 하는 것이다. 이는 내가 운동화를 현관에서 신지 않고 밖에 나가서 끈을 매고 신는 모습을 그대로 흉내 내는 것이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앞으로 가서 소화전을 보고 “할배 이게 뭐야?” 하고 물으면 변함없이 똑같은 대답을 한다. “어~, 이것은 우리 집에 불이 났을 때 불을 쉽게 끄려고 준비해 둔 곳이야.”. 다음은 승강기 버튼을 누르게 되는데, 이것 또한 준이가 해야만 직성이 풀린다.
한 번은 매일 되풀이 하여 물어보는 소화전에 대해서 건성으로 물어보는 것이 아닌가 하여 이번에는 “준아, 이것 뭐하는 거야?”하고 물어보면 내가 하였던 말을 그대로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 아이 어릴 때에는 내가 자상하게 대해본 일이 별로 없다. 아마 매일 되풀이 하여 질문을 하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바보같이 매일 똑같은 질문을 하느냐? 몇 번이나 물어보는 거야!” 핀잔을 주고도 남았을 것이다.
큰애가 1학년 들어갔을 때다. 누구나 마찬가지이겠지만 학교에 입학한 자식에 대해 기대를 많이 하게 된다. 그래서 똑똑하게 키워보려는 욕심이 앞서 독서를 많이 해야 한다며 동화책을 한 질씩 사서 매일 읽기를 강요했다. 그리고는 바쁜 중에 아이가 제대로 읽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읽은 동화책에 대해 질문을 하여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면 윽박지르곤 했다. 이때에는 자식을 사랑하는 자상한 아빠가 아니라 엄한 선생님으로 훈육차원에서 철저히 지도했으니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었겠는가. 거기에다 매일 그림일기까지 강요하여 아마 공부란 쳐다보기도 싫은 지긋지긋한 것이라는 것을 알려준 것이나 진배없다.
손자가 생후 10개월쯤 되었을 때 우리 내외는 매일 한밭 수목원으로 아침마다 산책하러 다녔다. 집에서 유모차를 싣고 이응노 미술관까지 가서 주차하고 유모차에 태워서 한밭 수목원을 산책하기로 한 것이다. 어릴 때부터 숲 속의 맑은 공기와 귀를 간질이는 청아한 새소리 아름다운 꽃과 벌레를 보며, 자연 속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에서다.
샛노란 새싹이 쏘옥쏘옥 틔우는 이른 봄부터 나풀나풀 꽃밭을 날아다니는 나비를 따라 아장거리며 따라다니던 봄이 지났다. 싱싱한 잉어들이 노니는 습지에서 물고기 밥을 주며 즐거워하던 모습, 제법 뒤뚱거리며 매미 소리 요란한 숲 속에서 비둘기를 잡으려고 뛰어다니는 여름에는 할아버지를 따라 운동도 제법 했다.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에 도토리를 주러 들어간 동산엔 예쁜 단풍잎이 원을 그리며 겨울을 재촉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우리에게 안겨준 고귀한 축복에 감사의 묵주기도를 드리며 산책을 했던 것이다. 아내와 나는 준이가 추워서 도저히 걸을 수 없다고 느낄 때까지 거의 1년을 하루도 빠짐없이 다녔던 한밭 수목원이다.
준이가 크면서 활동량이 많아지니까 하루하루가 다르다며 아내는 힘들어했다. 활동을 할 때마다 “아이고!, 아이고!” 신음 소리를 내며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손에서 준이를 놓는 일은 없다. 새해가 되면서 우리는 준이를 어린이집으로 보내기로 했다. 온종일 준이와 생활은 도저히 감당하기 어렵다는 생각에서다. 어린이집에 처음 2주일은 가기를 싫어했으나 곧 적응을 잘했다. 아내도 조금은 여유를 가지고 다시 친구도 만나고 집안 정리도 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된 것이다. 나도 매일 아침 어린이집에 가는 것을 내 차로 태워다 주었다. 이것이 조금이라도 아내를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서다.
내 차는 언제나 아파트 지하에 주차해 둔다. 어린이집을 갈 때에는 준이와 함께 먼저 집을 나서게 되는데, 지하에 들어가기 전 입구에서 한쪽에 침을 뱉는 것이 아닌가. 언제가 지하에 들어가기 전에 침을 뱉었던 기억이 났다. 내가 하던 모습 그대로 흉내를 내는 것이다. 세상에나 내가 하였던 그대로, 갑자기 맹모삼천지교가 생각이 났다. 아이들은 본 대로 느낀 대로 그대로 한다는 말이 실감 났다. 지난번에는 더워서 선풍기를 손가락으로 켜지 않고 무심코 발가락으로 슬쩍 눌러서 선풍기를 켠 일이 있다. 그 이후 선풍기를 켜라고 했더니 엄지발가락으로 똑같이 누르는 것이 아닌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아이 앞에서 하는 언행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이순이 지난 지금에서야 다시금 깨닫게 된다.
맹모삼천지교란 맹자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편모슬하의 어려운 환경하에서도 자식교육을 위해 세 번이나 이사하면서까지 학습환경이 좋은 곳으로 가서 훌륭한 학자를 만들어 냈다는 맹자 어머니의 이야기다. 물론 맹모삼천지교나 베틀의 실을 잘라버린 맹모 단기는 자식을 제대로 키워보겠다는 어미의 단호한 마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 부모들이 자식교육을 위해 전 생을 걸었기 때문에 민주화와 산업화를 이루어 이만큼이라도 국가발전과 부흥에 도움이 됐다고 본다. 그러나 근래 일부 과열된 학부모의 교육열정이 지나친 경쟁심으로 무조건 해외 유학을 보내거나 모든 교육활동을 어머니가 대신하여 마마보이를 만드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다. 맹모삼천지교는 교육경쟁이 아니라 바른 사람으로 키우겠다는 자식에 대한 사랑이었다는 점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