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른 변화가 오히려 느림이 행복인 세상을 만들었다. '느림은 행복이다'를 슬로건으로 내건 청산도. 제주도의 올레길과 같이 청산도에는 타박타박 천천히 걷는 슬로길이 있다. 느린 걸, 더딘 걸 음미하며 천천히 걷는 길. 저절로 걸음이 느려지게 하는 청산도의 멋진 풍경은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4월 18일, 청주아름다운산행에서 아시아 최초의 슬로시티 청산도를 다녀왔다. 완도항에서 19.2㎞, 뱃길로 50여분 거리의 청산도(靑山島)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공기가 맑고 하늘ㆍ바다ㆍ산이 모두 푸르러 청산(靑山), 신선들이 노닐 정도로 자연경관이 아름다워 선산(仙山) 또는 청산여수(靑山麗水)로 불린 신선의 섬이다.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와 KBS 드라마 봄의왈츠 촬영 장소로 알려지며 관광명소가 된 곳으로 초가집, 돌담길, 구들장논, 고인돌 등 주민들 고유의 생활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어 섬 전체가 살아 있는 민속 박물관이다. 파시가 열리던 어업전진기지라 각종 수산물이 풍부하고, 지리해수욕장·신흥리해수욕장·진산리 갯돌밭 등의 아름다운 비경이 시골의 아늑함과 편안함을 추구하는 도시민에게 쉼터를 제공한다.
새벽 3시 40분 청주종합운동장 앞에서 출발한 관광버스가 중간에 회원들을 태운 후 완도로 향한다. 모두들 잠을 설친 탓에 차내등을 끄고 억지로 눈을 붙인다. 관광버스가 호남고속도로 백양사휴게소에 들르며 부지런히 달리는 사이 운영진의 인사와 일정을 듣고 떡으로 아침을 대신하며 8시경 완도항에 도착한다. 남는 시간에 주도(추섬), 완도타워 등 항구 주변 바닷가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청산도행 여객선은 성수기와 비수기의 출항시간이 달라 완도연안여객터미널(061-552-0116)이나 청산농협(061-552-9388~9)으로 미리 전화해 승선권을 예매하는 것이 좋고, 승선할 때는 반드시 신분증을 지참해야 한다. 관광객이 많을 때 현장에서 구입하면 두세 시간 후에나 승선할 수 있다.
완도항에서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거리에 천연기념물 제28호로 지정된 식물의 보고 주도가 바다위에 떠있다. 주도 앞에서 9시에 출항한 아시아슬로우시티호의 뱃전에서 완도읍내와 신지대교를 비롯해 신지도, 소모도, 대모도, 소안도 등 크고 작은 섬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본다. 9시 50분경 한참 전에 기다랗게 모습을 드러냈던 청산도의 도청항 선착장에 도착한다.
청산도의 관문인 면소재지 도청항은 관광객들로 북적여 선착장에는 추억남기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도청항 건너편으로 노란 물결이 넘실대는 유채꽃밭이 눈에 들어온다. 옛날 주민들이 오가던 이동로가 지금의 '청산도 슬로길'이다. 키가 큰 도청2리 표석을 지나면 부둣가에 생활용품을 운반하느라 슬로길을 오갔을 지게들이 줄지어 서있다. 궂은 날씨에 부지런히 한 바퀴 돌아보려고 8곳의 정류장에서 환승이 가능한 순환버스 승차권을 5000원에 구입한다.
여행객들에게 슬로길 걷기의 시작을 알리고 느림의 의미를 전하는 '느림의 종'을 지나 도락리로 향한다. 어떤 길이든 길은 길과 연결된다. 바닥에 그려진 화살표를 따라 길을 걷는다. 도락리 안길에서 낮은 담장과 원색의 지붕, 정이 넘쳤을 좁은 골목을 만난다. 빛이 바랜 청산도의 옛 사진과 명언들이 담벼락에서 발길을 붙든다. 섬사람들이 처음 식수로 이용했다는 동구정을 지나면 줄지어선 해송과 정자가 안개와 어우러진 남도 바닷가의 갯마을 풍경이 멋지다.
청산도에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서편제와 봄의왈츠 촬영지가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풍경이 멋지고 유채꽃밭에서 추억을 남기며 환하게 웃는 사람들이 아름답다. 직선보다는 곡선, 인공보다는 자연이 청산도의 자랑거리다. 유채꽃을 구경하며 구부러진 길을 따라 천천히 걷는다. 논두렁과 밭두렁에 지천으로 피어있는 꽃들을 바라보며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다.'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본다.
임권택 감독이 한국적인 풍경과 판소리 노랫가락을 구성지게 들려준 영화 '서편제'를 비롯해 KBS 드라마 '봄의 왈츠', SBS 드라마 '여인의 향기'가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봄볕이 완연한 산등성이에 유채꽃이 만발해 사방이 노란색이다. 세트장과 유채꽃 물결, S자형 오름길과 바닷가의 갯마을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파도가 치면 치는 대로 자연에 순응하면서 순리대로 사는 섬사람들의 생활이 이해된다. 오로지 걷기 위해 청산도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 하나같이 아웃도어 복장인 것도 재미있다.
청산도에는 예전의 풍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많다. 그중 하나가 초분(草墳)이다. 초분은 시신을 땅에 묻지 않고 일정 기간 짚으로 만든 가묘에 장례하는 장례법이다. 고기잡이 나간 상주가 임종을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였기에 부모가 돌아가시면 일단 초분을 만들어 시신을 안치한 뒤 상주가 돌아오면 장례를 치루는 것도 자연에 순응하는 방법이었으리라. 마침 일반인들까지 참여하는 초분 시연이 열리고 있어 카메라에 담았다.
당리에서 순환버스에 올라 다음 정류장인 읍리에서 내리면 고인돌과 하마비공원을 구경할 수 있지만 비 오기 전에 범바위에 오르려고 청계리까지 갔다. 청산도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범바위다. 범바위는 바위가 뿜어내는 강한 자기장이 휴대전화와 나침반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신비의 바위로 알려져 있다. 청계리 정류장에서 하차하여 범바위 입구까지 운행하는 셔틀버스에 승차하면 쉽게 범바위나 보적산에 쉽게 오를 수 있다. 축제기간에만 이용할 수 있는 버스라 왕복요금도 1000원이면 된다.
이 바위를 향해 포효한 호랑이가 울림으로 들려온 소리가 자신의 소리보다 크자 더 큰 호랑이가 살고 있으리라는 생각에 섬 밖으로 도망쳐 범바위로 불린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청산도에서는 편지도 느려 훗날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한다. 범바위 전망대 아래편에 편지를 써서 넣으면 1년 뒤에 배달된다는 느림 우체통이 있다. 날씨가 맑은 날은 남쪽의 여서도 뒤편으로 제주도가 아스라이 보이지만 곧 비가 내릴 듯 흐리다. 범바위에서 내려와 순환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일기예보대로 제법 굵은 빗줄기가 쏟아진다.
다랭이논이 많은 청산도의 귀중한 유산이 구들장논이다. 양지리에 가면 산비탈의 논바닥에 구들장을 놓듯 돌을 깔고 그 위에 흙을 부어 농사에 필요한 만큼의 물만 고이고 남은 물은 아래로 흘러가도록 만든 구들장논을 구경할 수 있다. 16~17세기 무렵 청산도에 정착한 사람들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구들장논은 국가중요농업유산 1호로 물이 부족한 섬의 환경을 선조들이 지혜로 극복한 농업유산이다. 이곳에 느린섬 여행학교가 있어 슬로푸드 체험 및 식사를 즐기며 바쁜 일상 속 느림의 여유를 보다 아늑하게 즐길 수 있다.
국립공원 명품마을인 상서리에 도착해 야트막한 돌담과 고목을 구경하며 구불구불 휘어져 들어가는 좁은 고샅길로 걸음을 옮긴다. 동촌리까지 이어지는 상서리 돌담(등록문화제 제279호)은 시골 마을의 아름다움과 정서를 고이 간직하고 있어 더 고상하고 우아하다. 좁은 골목에 농기구가 들어가기 어려워 청산도에는 지게질이나 쟁기질이 많이 남아 있다.
투구새우전시관에서 사진으로나마 생소한 긴꼬리투구새우에 대해 알아본다. 안내자료에 의하면 5월경부터 관찰할 수 있는 긴꼬리투구새우는 넓고 납작하며 대부분이 갑각으로 덮여 있고 진한 연두색 바탕에 짙은 녹색 무늬가 있으며 야외에서는 환경상태에 따라 20~30일의 짧은 기간만 관찰된다. 마을을 벗어나면 추위 이겨내고 푸르게 돋아난 청보리와 제법 널찍한 유채꽃밭이 봄날의 싱그러움을 더한다.
순환버스로 이동하며 물이 깨끗하고 조용하며 백사장이 매우 넓고 주변바다가 전부 낚시터로 완만하게 굽은 등을 가진 신흥리 풀등해수욕장, 둥근 갯돌들이 만든 파도소리가 귀를 즐겁게 하고 청산도에서 가장 인상적인 해돋이를 감상할 수 있다는 진산리 갯돌해수욕장, 수심이 완만하고 모래사장이 길게 펼쳐지며 해송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는 청산도의 대표적인 일몰 포인트 지리 청송해변을 들러봤다.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느림의 미학을 만끽하고,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풍경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청산도의 매력이다. 순환버스를 타고 도청항으로 갔다. 선착장 주변에 전복을 파는 식당들이 많다. 고깃배들이 한가롭게 떠있는 도청항 주변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4시 10분 아시아슬로우시티호가 도청항을 출항한다. 봄에는 꽃 좋고, 여름에는 물 좋고, 가을에는 먹거리 좋고, 겨울에는 하얀 천지가 아름다워 또 찾아오게 한다는 청산도가 점점 멀어져간다. 5시 완도항에 도착할 때까지 뱃전에서 아침에 봤던 바다풍경을 구경하며 여유롭고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를 생각했다..
5시 30분경 완도연안여객선터미널 주차장을 출발해 55번 지방도의 남창휴게소(061-535-0088)에서 젓갈정식으로 저녁을 먹고 호남고속도로 백양사휴게와 벌곡휴게소에 들르며 부지런히 달려온 관광버스가 11시 10분경 청주체육관 앞에 도착하며 장거리 섬 산행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