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가 스승의 마음을 알아줄까? 그렇다면 제자와 스승과의 관계가 성립할 수 있다고 본다. 반대로 제자가 스승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한다면 이건 스승과 제자 사이가 아니다. 그냥 선생님과 학생으로 맺어진 관계에 불과하다.
웬 스승과 제자 타령인가? 교직경력이 38년이 넘지만 남에게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사실 하나. 바로 제자의 결혼 주례를 서지 못했다는 것이다. 제자들에게 인생의 멘토가 되었다면 그럴 기회가 왔겠지만 스승의 반열에 끼지 못하였기에 그냥 쓸쓸히 교직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이 마음을 초임지 초교에서 가르쳤던 제자가 눈치를 채었다. 1970년대 후반, 그들을 3학년부터 3년간 가르쳤지만 주례를 부탁한 사람은 없었다. 이제 그들이 40대 후반이니 시기적으로 지났다. 초교에서 6학년 가르친 것은 수원에서 딱 2회다. 중등에서는 오산에 있는 모 여중에서 3학년 담임 1회 한 것이 전부다.
작년 이 맘 때. 초임지 제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선생님, 저랑 같이 졸업한 ○○이 아시죠? 46세인데 결혼 한답니다. 제가 선생님께 주례 부탁하라고 했으니까 아마 연락이 올 거예요. 주례 허락 부탁드립니다.” 역시 다르다. 초교 시절 줄곧 반장을 하며 모범적인 제자가 스승의 부끄러움을 메워 주려한 것이다. 마음이 통한 것이었다.
얼마 후 정말 ○○로부터 연락이 왔다. 결혼식날을 잡았다며 찾아 뵈올 터이니 주례를 부탁한다고 하였다. 허락을 하고 그 대신 숙제를 내어 줄 터이니 해결해야 한다고 부탁했다. 결혼식을 뜻깊게 할 ‘신랑과 신부의 약속’을 스스로 작성하고 낭독하라는 숙제다. 다행히 과제를 하겠다고 하여 주례가 성사되었다.
주례는 축의금을 얼마를 내야할까? 요즘 돈 가치로 보면 10만원 정도면 되지 않을까? 스승이 제자의 주례를 본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영광이다. 그래 기꺼이 축하해 주고 주례를 서자. 주례비로 받은 30만원을 축의금으로 냈다. 반장이었던 제자는 친구에게 신혼여행 후 꼭 주례를 찾아뵈라고 당부하였지만 무슨 일이 있는 지 아직까지 연락이 없다.
이게 바로 스승과 제자의 마음이다. 똑 같이 3년을 가르쳤지만 마음이 통하는 제자가 있는가 하면 그냥 스쳐지나가고 마는 인연도 있다. 그냥 과거에 가르쳤던 선생님과 학생으로서 머무는 것이다. 초등학교에서 3년간 담임을 했다고 다 제자라고 할 수 없다. 서로의 마음이 통할 경우라야 비로소 인간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올해엔 1980년대 초반, 두 번째 근무지였던 수원의 ○○초교 6학년 6반 담임을 했던 제자들과 연결이 되었다. 현충일에 제자들이 여러 명 나왔다. 점심 식사를 잘 대접받고 출퇴근 신사용 가방까지 선물로 받았다. 필자는 답례로 졸저 교육칼럼집을 저자 사인하여 선물하였다.
식사 대접 받고 선물까지 받아 기분이 좋기는 하지만 스승으로서 체면이 바로 서지 않는다. 얼마 전 모임을 주관한 제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답례로 점심을 사고자 하니 모임을 주선해 달라고 하였다. 이왕이면 제자가 하는 음식점에서 하면 일석이조라 장소도 제자 음식점으로 하였다.
제자 4명이 나와 함께 식사를 하였다. 갈비집이어서 갈비를 뜯었다. 주인 제자가 종업원에게 음식량을 넉넉히 주문한다. 이제 성인이 된 40대 제자이기에 반주로 소주와 맥주를 함께 하였다. 서로가 과음은 할 수 없고 해서 적당량을 들었다. 이제 음식값을 계산할 때다. 술값은 빼고 갈비찜값만 내라고 한다. 아마도 스승에게 술값을 내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싶었나 보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에게 지식을 가르쳤다고 스승이 아니다. 지식만을 배운 학생은 제자가 아니다. 스승이 되려면 제자에게 인격적 감화를 주어야 한다. 학생을 사랑으로 가르쳐야 한다. 때론 제자가 잘못했을 경우, 사랑이 들어간 질책은 제자도 그 마음을 안다. 삶에 있어서 인생의 멘토가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이번 두 가지 일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헤아려 주는 행복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생각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