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월에 접어들자 낮의 길이는 더 짧아진다. 바래지는 형형색색의 가을은 낙엽 속에 정(情)으로 물들어 흩어진다. 일 년간 한 몸으로 지내던 나무가 잎을 떨구어 낼 때 마음은 어떨까? 낙엽활엽수의 일 년을 보니 압축된 사람의 자화상 같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지는 마음은 여러 가지이다. 그중 희로애락은 보통 사람 필부가 가지는 대표적인 감정인데 이 마음의 이면에는 언제나 정이 관계 하고 있다. 부모와 자식간, 연인 간의 사랑도 오랜 시간을 지나면 무디어 곰삭아 정으로 더 깊게 된다. 그래서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끈끈한 정 때문에 정 때문에 괴로워 혼자 울고 있어요’란 노랫말이 생겼는지 모를 일이다.
지난 시월 중순경이었다. 뜨겁게 달구었던 여름이 지나자 걱정거리가 생겼다. 그것은 어른 손바닥보다 큰 거북이 두 마리 때문이었다. 여름철엔 움직임도 먹성도 좋은 녀석들이 하루가 다르게 조용해지고 먹이도 남기기가 일쑤였다. 혹시 병이나 들지 않았나 하자 열대지방에 사는 녀석들이라 기온이 낮아져서 그렇다고 한다. 아마 이런 날씨 같으면 영상 십 도에서도 얼어 죽는 인도 사람과 같은 조건이란다. 그래서 실내에 들여놓으려고 하여도 냄새도 나고 징그러워 망설여졌다.
거북이를 키우기 시작한 것은 십 년 가까이 된다. 아이를 키우면 발달 과정상 작은 곤충, 물고기에 관심을 갖는 시기가 있다. 큰 녀석을 키울 때였다. 개울에서 건져온 올챙이가 개구리가 되어 어항을 뛰쳐나와 거실 바닥에서 밟혀 죽어 대성통곡을 한 일이 있었고 학교 앞에서 파는 병아리를 키우다가 어찌하지 못하여 시골 외할머니댁에 준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 거북이의 경우는 좀 남달랐다. 직경 삼 센티미터 남짓한 새끼 거북을 사 와서 성장할 때까지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은 것이다.
지난겨울이었다. 너무 자란 녀석들을 거실에 들이지 못해 현관에 두고 겨울잠 잔다고 물도 갈아주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월 어느 날 둘째 녀석이 울먹거렸다. 거북이 두 마리 중 나중에 들여온 녀석이 물을 갈아주지 않아 눈병이 걸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학교에서 돌아오기 무섭게 안약을 사다 넣기를 반복하더니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았다. 그 모습을 보며 무관심한 듯하였지만 어릴 때부터 키운 녀석이라 정이 많이 들었구나!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지난겨울은 넘겼지만 다가오는 겨울은 어떻게 넘길지 걱정이 되었다. 그리하여 내린 결론은 녀석들을 가져온 수족관에 다시 돌려주자는 것이었다. 다행히 파충류 기르기에 관심이 있고 자기 집에 큰 수족관이 있는 학생이 분양해 간다 하여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거북이를 주기로 한날이 다가왔다. 묵직한 두 녀석을 비닐봉지에 담아 집을 나서려는 순간 둘째 녀석이 사색이 되어 다가왔다. 비닐봉지에 그렇게 담아가면 질식해서 죽을 것이라며 둥근 플라스틱 그릇에 담아 가야 한다며 난색을 보였다. 아쉬움 반 시원함 반, 뭐라 말할 수 없는 복잡한 심경으로 어둑어둑해지는 골목을 벗어나는 발걸음이 복잡한 느낌표를 찍었다.
거북이를 키우면서 붙여준 이름이 있었다. 그건 한 달 상관이지만 먼저 들여온 녀석을 갑, 나중에 들여온 것을 을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태생의 순서는 이길 수 없는지 언제나 먹성과 움직임, 성장이 활발한 쪽은 갑이었고 병치레는 을이었다. 또한, 햇볕 좋은 날이면 갑은 을의 등에 올라가 네 다리를 쭉 펴 등을 말리며 휴식을 취하곤 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얄미워 갑 노릇 한다고 살짝 뒤집어 놓기도 하였다. 이렇게 가까이한 녀석들을 보내고 난 뒷날 하루의 시작이 거북이 물 갈아주는 일이라 무심결에 찾다가 아 보냈지! 하며 그놈의 정이 뭔지 하며 중얼거리기도 하였다.
정 하면 떠오르는 이야기가 영화 ‘캐스트 어웨이’에 나오는 톰 행크스와 배구공 윌슨의 관계이다. 영화의 주인공 톰 행크스는 시간을 다투어 경쟁하는 택배 회사를 운영하다 비행사고로 무인도에 표류한다. 그리고 그곳으로 떠밀려온 배구공을 발견하고 윌슨이란 애칭을 부여하며 사 년을 자문자답하며 지내다 뗏목을 만들어 거친 파도를 헤치고 탈출을 시도한다. 그 과정에서 거센 풍랑을 만나 윌슨을 잃어버리자 오열을 하며 기진맥진해 있다 지나가는 배에 구조된다. 여기서 톰 행크스가 배구공에 갖는 애착이나 보낸 거북이에게 갖는 미련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관계 속에서 정을 만들며 메마른 부딪힘을 부드럽게 하고 소통과 도움으로 이끌어 관계를 훈훈하게 한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 이 정은 느슨해지고 마음 바닥에 자리 잡기 시작한 이기심과 탐욕은 끊임없는 사건사고를 재생산 하고 있다. 그리고 나에게 도움이 안 된다 싶으면 이분법으로 판단해 헌신짝처럼 버리며 마음 밭에 송곳 하나 꽂을 자리조차 주지 못하고 있다.
늦가을 바람 끝이 차다. 큰 것보다는 자그마한 것, 새것보다는 오래되고 손 떼 묻은 물건을 소중히 거두는 마음이 정이다. 오늘 아침도 찬 기운을 느끼며 분양되어 간 거북이는 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몰려온다. 과연 이 마음을 정이라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