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너

2024.11.15 (금)

  • 맑음동두천 10.9℃
  • 구름많음강릉 16.0℃
  • 맑음서울 14.0℃
  • 맑음대전 13.2℃
  • 맑음대구 13.6℃
  • 구름많음울산 17.4℃
  • 맑음광주 14.1℃
  • 맑음부산 19.2℃
  • 맑음고창 11.3℃
  • 맑음제주 19.9℃
  • 맑음강화 12.4℃
  • 맑음보은 11.3℃
  • 구름조금금산 7.5℃
  • 맑음강진군 15.9℃
  • 구름조금경주시 14.7℃
  • 맑음거제 17.0℃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교단일기

학교 화장실 문화 변천 소고(小考) 1

1960년대 우리집 화장실 이름은 뒷간이었다. 그 당시 우리집 뒷간 위치는 대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구석진 곳에 위치하였다. 유년 시절 화장실은 두려움의 존재였다. 특히 밤중에 뒷간에서 볼일 보는 것은 무서움 그 자체였다. 더욱이 전등 시설이 되어 있지 않아 부모님이 동행해 주어야 안심이 되었다.

방학을 이용하여 시골 외가에 놀러 간 일이 있었다. 측간이 비교적 넓었는데 한 쪽에는 잿더미가 있었다. 어린이들은 측간 흙바닥에 변을 보고 삽으로 떠서 재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재를 한 삽 떠서 변을 덮었다. 이게 시골에서의 대변처리 방법이었다. 그 당시 밑씻개 재료로 가장 좋은 것은 부드럽고 얇은 일력(日曆) 종이였다.

1960년대 ○○초등학교 변소는 학교의 커다란 건물 바로 뒤에 두 곳 있었다. 지금도 기억에 선명한 것은 화장실이 앞 건물에 가려 항상 그늘이었고 기와지붕이었는데 남녀공용이었다. 한쪽은 남자들 여러 명이 동시에 소변을 볼 수 있는 시설이, 맞은 편은 칸막이용 화장실이 10여개 있었다. 화장실 위에는 학년반 표시가 붙어 있었다.

그 당시 어린이들은 변소를 무서워하였다. 그 이유는 대변 보는 곳은 밑바닥이 너무 깊어 발을 헛딛여 빠질 것을 걱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볼일이 있을 때는 가능하면 용건만 빨리 보고 후다닥 나오는 것이었다. 특히 밤에는 그 곳을 이용하는 것을 꺼렸는데 그 곳에서 도깨비나 귀신이 나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때 화장실도 역시 본 건물과는 떨어진 외부에 있었다. 초등학교 때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벌을 부과하는 것이 바로 변소청소였다. 중학교에 입학하니 학급별로 담당구역이 있어 화장실 청소는 담당학급에서 맡았다. 청소하는 학생들은 화장실을 순환제로 맡았다. 청소 후 담임선생님께 검사를 받았음은 물론이다.

중학생 시절, 공중 화장실에 대한 추억 하나. 하교 길, 수원천변 시장통에 공중화장실이 있었다. 큰 것을 보려고 그 화장실에 들어갔으나 코를 막고 그냥 나오고 말았다. 화장실 문을 여니 발 디딜 자리가 보이지 않는다. 벽에는 온통 이상한 낙서 천지고. 시각과 후각에 있어 도저히 여기서 볼 일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나라 1960년대 후반 공중화장실의 현주소다.

화장실은 그 나라 문화 수준과 직결된다고 한다. 그 당시는 화장실이 왜 이렇게 지저분했을까? 우선 화장실이 공용이다. 여러 사람이 사용하는데 무책임하게 이용한다. 무료이기 때문에 아무나 이용한다. 관리자가 없다. 그러니 처음엔 깨끗하다가도 금방 지저분해지고 마는 것이다. 그 당시 유료이거나 일정 보수를 받는 관리자가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이용자에게 불편을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1970년대 초반 고교시절, 역시 화장실은 외부에 독립된 건물로 있었다. 그 당시 남학생들은 주로 소변을 볼 때 화장실을 이용했다. 가능하면 큰 것을 볼 때 학교 화장실을 이용하지 않으려고 등교 전 미리 집에서 볼일을 보았다. 화장실을 다녀오면 주위사람들에게 냄새를 풍겨 폐를 끼치기 때문이다.

1975학년도 예비고사를 보고 대학에 입학하였다. 대학 본관 건물과 도서관에는 수세식 화장실이 층마다 두 곳이나 있었다. 더 이상 화장실이 냄새나고 더러운 곳이 아니었다. 볼일을 보고 손을 깨끗이 씻을 수 있었다. 교직원 화장실에는 화장지도 비치되어 있었다. 교양 있는 학생들은 소지품으로 화장지를 가지고 다녔다. 이 맘 때 ‘화장실’이라는 명칭이 비로소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배너



배너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