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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자식은 부모의 행복을 생각할까?

어느 교직선배의 가족사를 보며

얼마 전, 필자의 장인 어른 장례식장에 한 선배님이 오셨다. 교육계에서 6년 전 정년 퇴직하신 이 분은 아마도 이름만 대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경기도내 여러 곳에서 초‧중‧고 교사를 거쳤고 교육연구사, 교감, 교장을 거쳐 장학관, 연구관을 하였고 교육장도 역임했다. 정년퇴직은 최종 재직한 모 고교에서 하였다.

선배님과 대화 도중 깜짝 놀랄 만한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20살 때 과부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때 돌 지난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바로 자신이라고 한다. 지금도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데 연세가 90세라고 한다. 교육계에서는 효자라고 소문난 선배다. 자신의 가정사를 노골적으로 밝히지 않는 분인데 장소가 장소인만큼 이런 이야기가 나왔나 보다.

작년부터 필자는 현직에 있을 때 후배사랑이 각별하신 분들에게 연락을 취하여 고마운 마음을 표하고 식사를 대접하고 있다. 그런데 이 선배님께 문자를 보내니 어머니 때문에 응하기 어렵다고 답이 온다. 그러고 보니 근래 선후배 등산모임에도 결석을 하신다. 역시 효자는 다르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모시고자 모임에 불참하는 것이다.

그 분 왈, “어렸을 때는 내가 어머니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제는 내가 그 벌을 받아 어머니가 나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꼼짝 못합니다.” 모임에 불참을 알리면서 농담으로 던진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그러던 분이 장례식장에 오신 것이다. 어떻게 시간을 내셨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후배사랑에 우선 순위를 잠시 바꾼 것은 아닌지?

며칠 전 선배님으로부터 뜻밖의 전화가 왔다. 이 때다 싶어 점심이 가능하냐고 여쭈어 보았다. 그리하여 또 다른 선배님과 함께 세 명이서 중화요리로 점심을 하였는데 굳이 말려도 선배님이 식사값 계산을 하신다. 다른 선배님 왈, “저 선배님은 후배들이 있을 때 본인이 계산해야 행복해 하신다”며 그 분 뜻에 따르라고 눈치를 준다. 이 자리에서 선배님의 35세 장애인 아들을 뒷바라지하고 있음을 처음 알았다.

선배님에 관한 이야기를 아내와 함께 나누었다. 선배님의 유‧소년기, 학창시절이 얼마나 어려웠었는지 짐작이 가고 남는다. 1940년대 말이면 여자가 아무리 꽃다운 나이라도 재혼이 어려운 때다. 자식이 있는 경우에는 더더욱 제약이 많았다. 시대적 배경이 재혼녀를 좋게 보지 않았다. 미망인은 자식과 함께 살면서 자식을 훌륭하게 키우는 것을 미덕으로 알았다. 본인의 행복보다 자식을 위한 헌신이 훌륭한 부모상이었다. 대부분의 어머니가 이러한 가족적 사회적 시대적 요구에 따랐었다.

이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여서 그런가? 아내의 대안 제시가 나왔다. “자식이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가졌을 때나 아들이 결혼하고 나서 재혼하셨으면 어떠했을까?” 선배 어머님의 나이를 계산하니 40세와 52세다. 지금으로 볼 때 충분히 재혼이 가능한 나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아무 이해관계가 없는 제삼자의 생각이다. 과부가 된 후 20년 후나 32년 후 재혼을 생각하라고?

문득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가 떠오른다. 1964년, 43세의 나이에 혼자가 되었다. 그 당시 우리집 자식 모두 여섯 명이었다. 해군에 복무 중인 큰형(23). 국립사범대 1학년생인 작은형(20), 누나(초교 5년), 나(초교 2년), 여동생(5살), 막내 여동생(3살). 어렸을 적 우리 어머니 말씀이다. “그 당시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눈앞이 깜깜했다. 어린 자식 키우려고 동냥까지도 생각했다.”

물려받은 것은 집 한 채 뿐. 그 외 아무런 경제력 없는 여자가 육남매를 먹여 키울 것을 생각하니 밤에 잠이 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재혼을 생각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재혼을 하면 6명의 자식을 받아 줄 남자는 없다. 그러면 어린 자식은 거지가 되거나 보육원으로 들어가야 한다. 어머니는 혼자서 어떻게 해서든지 자식을 키우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후 어머니의 찌든 삶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우리 어머니의 의지와 희생으로 다행히 6남매는 번듯하게 자랐다. 막내 아들인 필자,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어머니가 친구들과 함께 외부남자들과 놀러가는 것이 그렇게 싫었다. 한편으로 겁이 나기도 하였다. ‘만약 어머니가 자식들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재혼을 한다면?’ 어느 때인가는 귀가하였을 때 어머니가 집에 계시지 않으면 불안에 휩싸이기도 하였다. 어머니를 찾아 밤늦게 시내를 헤매기도 하였다.

자식은 부모의 행복을 생각할까? 내 경험으로 보아선 ‘아니다’이다. 자식은 부모에 무조건적인 헌신만을 요구한다. 자식의 행복을 위하여 부모는 당연히 몸과 마음을 바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자식을 낳았으면 어떤 상황이 되었든지 간에 자식을 먹이고 입히고 교육시켜 키우는 것이 부모의 당연한 의무라고 주장한다. 부모의 행복은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그런 생각을 할 수 없다. 역지사지의 사고가 어렵고 자신만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너 늙어봤니, 나 젊어봤다” 라는 유행가 가사가 있다. 결혼하지 않고 자식을 길러보지 않은 사람은 부모 마음을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부모는 자식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리고도 남는다. 자식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려고 한다. 이게 바로 부모의 마음이다. 자식에게 부모의 행복을 생각하라고? 그것은 철부지 자식들에게는 가당치도 않는 일이다. 자식들은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그제야 후회한다. 필자가 이순(耳順)이 되어 겨우 깨달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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