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육의 천국으로 불리던 독일에서 사립학교에 눈을 돌리는 학부모들이 늘어나고 있다. 독일의 초등학교는 무상교육인데 반해 사립학교나 국제학교는 적지 않은 교육비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립학교들은 문을 닫고 있는 실정이지만 사립학교는 매년 80∼100개 새로 문을 열고 있다. 학부모들은 왜 사립학교를 선호할까?
독일에 사립학교가 매주 한두 개씩 우후죽순처럼 생기고 있다. 이와 함께 독일의 교육적 지형도 바뀌고 있다. 공립학교들은 문을 닫고 있는 실정이지만 사립학교는 매년 80∼100개 새로 문을 열고 있다. 그렇다면 누가 이렇게 사립학교를 세우고 있는 걸까? 이들은 예전의 사립학교 설립자들처럼 권위주의에 반대하며 거창한 대안교육을 꿈꾸는 교육철학자들이 아니다.
현재 독일에서 사립학교 설립 붐을 일으키고 있는 주체는 바로 학부형들이다. 이들은 더 이상 공립학교의 교육을 신뢰하지 못한다. 한 달 전쯤 독일의 소규모 도시인 브레멘에서는 공식인가를 받지 않은 사립 초등학교가 14년간 버젓이 운영되었던 사실이 밝혀지면서 충격을 안겨줬다. 공교육을 믿지 못한 학부모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학교였다. 일률적으로 정해진 교과과정만 따르는 공립학교 교육은 학생들의 지적 호기심과 창의력을 앗아간다고 생각하는 학부형이 늘고 있다.
실례로 독일에 잘 알려진 텔레비전 방송 진행자인 요오크 필라바는 13명의 다른 학부형과 함께 직접 사립학교를 세웠다. 마리아 몬테소리의 교육이념을 따르는 작은 초등학교다. 학부형들이 직접 학교 운영을 책임지고 있다. 이들은 매달 200유로의 수업료를 지불하면서도 학교 행정업무도 마다하지 않고 직접 참여하고 있다. 어떤 이는 직접 학교인터넷 홈페이지를 만들고 또 어떤 이는 체육시간에 보조교사로 일하며, 어떤 학생의 할아버지는 이 학교의 건물관리인을 하고 있다. 학교가 생긴 지 아직 초기 단계라 2∼3년 후에야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독일에선 교육 콘셉트가 독일 기본법에 크게 어긋나지 않고, 또 그에 따르는 재정적 뒷받침이 된다면 누구나 사립학교를 설립할 수 있다. 또 국가가 규정하는 교과과정의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쉽게 인가 받을 수 있다. 이렇게 설립된 사립학교는 2∼3년의 실험기간을 거쳐 검증 받으면 국가에서 전체 재정의 60%에서 70%까지 지원받을 수 있다.
현재 여론조사에 따르면 독일 학부모의 20%가 자녀를 사립학교에 보내려고 한다. 하지만 독일의 사립학교는 전체 학교 수의 7.5%에 불과하다. 또 학생 수로 따지면 사립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전체학생의 6.5%다. 당연히 사립학교 입학의 경쟁도 치열하다. 2001년도 ‘학업성취도 국제비교연구(PISA)’ 보고서의 충격으로 사립학교가 열풍이 일어났다는 견해도 많지만, 통계를 살펴보면 독일 통일 후인 90년대 초부터 사립학교가 꾸준히 늘고 있다. 통일 전 동독 지역에 사립학교가 하나도 없었으므로 동독 지역에 사립학교 숫자 증가비율이 훨씬 높긴 하지만, 통일 후 전체 사립학교 수가 40% 더 늘었다.
이에 발맞춰 상업적 이익을 보려는 사립학교도 성업 중이다. 1년 전 베를린에서 문을 연 사립학교 포름(Phorm)은 수익성 증권회사를 만들었다. 얼마 전까지라면 독일에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제 이 학교의 상업성에 대한 비판도 무색할 정도로 학교엔 학생들이 몰리고 있다. 수업료는 지역과 부모의 소득수준에 따라 한 달에 140유로에서 840유로에 달한다. 다른 사립학교보다 월등히 가격이 높다. 이에 대해 포름 사립학교의 재단장 베아 베스테는 “자녀에게 최신 학습 방법과 시설로 최상의 교육을 선사하고 싶다면, 그에 상응하는 비용이 들기 마련”이라고 강조한다.
포름 사립학교는 쾰른, 뮌헨, 프랑크푸르트에도 이미 문을 열었으며, 현재 함부르크와 하노버에도 개교를 준비 중이다. 미국인인 베를린 포름 학교 교장 리처드 헨젤브로크는 아이들이 학교에 가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렇지 않았다면 교사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240명의 초등생과 20명의 인문계학생이 다니는 이 학교 교문 앞에 서서 그는 매일 아침 등교하는 학생에게 일일이 인사한다. 교장은 “학생들은 이 학교에 다니면서 자신의 재능과 성공에 대해 믿음을 갖게 될 것이다. 또 우리 학교는 학생들이 취학 전부터 자신의 재능을 알고 개발하도록 지원할 것이다”라며 교육 소신을 피력했다.
포름 사립학교에선 두 가지 언어, 영어와 독일어 두 언어로 수업이 진행된다. 교사들 상당수가 영어권 국가 출신이다. 한 학급의 학생수도 매우 적을 뿐더러 초등학교 과정에선 수업 시간 당 교사가 둘이다. 또 수업 종소리가 없고, 수업시작 시간이 9시로 보통 8시 반에 수업을 시작하는 다른 학교에 비해 훨씬 늦다. 학생들이 충분한 수면을 취하게 하려는 배려다. 또 독일의 학교에서 시행되고 있는 성적 부진 학생들이 그 학년을 되풀이하게 하는 낙제제도가 없다. 이처럼 대안 교육의 요소도 다분히 있다. 포름 사립학교는 앞으로 10년 안에 전 독일에 모두 40개 학교를 개교하고 ‘고급 교육의 브랜드’로 자리 잡을 포부를 갖고 있다.
한편 독일에선 대안학교에 대한 열기 역시 아직 식지 않았다. 대안학교들도 꾸준히 생기고 있다. 80년대 ‘99개의 풍선’이라는 노래로 인기를 끌었던 팝가수 네나가 함부르크에 대안학교를 설립해서 화제다. 부모님이 모두 교사인 그녀가 설립한 이 학교는 ‘새로운 학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학생들이 모든 결정권을 가지고 있다. 이곳엔 학급도 없고 수업시간표도 없다. 공부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 이 학교의 기본 이념은 미국 서드버리 학교의 것으로 세계에 모두 40개가 있다. 아이들이 언젠가는 스스로 학습하고자 하는 욕구가 생긴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학생들은 교사를 스스로 선택하고 다른 학생들과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상의한다.
빌레펠트의 대안학교인 ‘실험실 학교’ 학문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는 클라우스 위르겐 틸만은 이러한 사립학교 열풍에 대해 “독일의 공립학교는 대안교육을 더욱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틸만은 “현재 비스바덴의 헬레네 랑에 학교나 보쿰의 자유학교와 같은 독일의 사립 대안학교에는 정원수에 비해 3, 4배가 더 많은 지원자들이 몰려든다. 공립학교들이 더욱 개혁교육을 지향한다면 우리가 그리 많은 사립학교를 세울 필요가 없을 것”이라 덧붙였다.
독일의 사립학교는 80%가 카톨릭이나 개신교계열이다. 그 다음으로 수가 많은 사립학교는 발도르프 학교다. 그 밖의 다른 계열의 학교는 몬테소리나 다른 대안학교들이 대부분이다. 사립학교가 부유층 자녀들의 전유물이라는 편견 못지않게 현실 또한 그러하다. 수업료는 보통 부모님의 수입에 따라 그 액수가 단계별로 나뉘어 있고, 저소득층 자녀를 위해 학비 면제 제도도 있지만 보통 교육 수준이 낮은 부모들은 자녀를 어떤 학교에 보낼지 고민을 거의 하지 않는 게 현실이다.
독일 공교육에 불신을 가지고 있는 부유층 학부형 일부는 독일 사립학교에도 성이 차지 않아 자녀들을 영국 엘리트 국제 기숙학교에 보내고 있다. 영국 기숙학교에선 독일인이 세 번째로 규모가 큰 외국인 집단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사립학교의 출신들의 학업 성취도는 공립학교와 비교해 월등히 뛰어날까? 사실 사립학교 출신들이 더 나은 성적을 보인다는 통계자료로 검증된 보고는 없다. 그러나 PISA테스트를 공립학교 대 사립학교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상류층 가정의 학부형이 사립학교를 선호한다는 것을 감안했을 때 사립, 공립학교 사이의 학업성취도 차이가 그리 크지는 않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