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좌우하는 이야기 본능

인간에게는 식욕, 성욕, 수면욕 같은 기본적인 욕구뿐 아니라 온갖 대상에 대한 욕망이 있을 터인데, 그 중에는 이야기를 향한 본능도 있다. 이야기는 우리 삶 도처에 스며 있으니, 이를테면 이야기와 별 관련이 없어 보이는 스포츠 경기에서도 사람들은 ‘한 편의 드라마’를 기대한다.
사람들은 경기를 관람하면서도 이야기 본능을 충족할 수 있을 때 더욱 만족을 느낀다. 우리는 마치 기승전결을 갖춘 완결된 이야기를 읽는 것처럼 게임을 지켜보면서, 경기의 흐름이 반전과 역전으로 긴장감 넘치는 전개를 보여줄 때 더욱 열광한다. 또한 스포츠 경기와 관련한 인물과 사건 등 끊임없이 주변 이야기와 뒷이야기를 즐긴다.
우리 속에 내재한 이야기 본능이 비단 즐거움 때문이라고만 여기는 것은 곤란하다. 이야기를 추구하는 열망은 상처 받은 마음의 치유에 관여하기도 하고 삶과 죽음을 좌우하기도 한다.
고아나 입양아처럼 부모가 누구인지, 고향이 어디인지 등등 자신의 서사를 모르는 사람들은 정체성 혼란 때문에 고통을 받으며, 개중에는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의 괴로움은 삶의 첫 단추인 자신의 출생담을 제대로 구성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자신의 인생담을 유기적 구성을 갖춘 한 편의 이야기로 완성할 수 없다는 데서 오는지도 모른다. 삶은 자신의 인생을 한 편의 이야기로 끊임없이 재구성하는 과정인 까닭이다.
이야기 형식으로서의 서사와 소설
이야기는 아마도 인간의 언어와 거의 동시에 출현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본디 ‘말하다’는 ‘이야기하다’와 뜻이 같다. 다만 이야기에는 일정한 줄거리가 있거나 주제 혹은 화제가 있어야 하니까, 말의 분량이 어느 정도 모여야 이야기로 발전할 수 있다.
이야기 형식에는 크게 서사와 소설이 있다. 서사는 사실을 바탕으로 하거나 지어낸 이야기다. 그것은 이야기를 다루는 것, 또는 이야기에 관한 모든 것을 포함하므로, 동서고금을 통틀어 존재하는 모든 이야기를 서사라고 부를 수 있다. 이에 비해 소설은 서사 가운데 일정한 조건을 갖춘 것을 가리킨다. 문학의 장르를 구분할 때는 보통 서사, 서정, 극 장르가 상위 범주를 이루고, 소설, 희곡 등은 하위 범주에 포함된다.
소설은 사실 또는 작가의 상상력에 기초해 허구적으로 꾸며낸 산문체의 문학 양식이지만, 무엇보다도 근대 이후에 서구에서 발생한 문학 형식이라는 점을 꼭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근대적 문학 양식이라는 세 마디 말에 소설의 본질을 둘러싼 매우 복잡한 내용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근대어와 소설의 언어
서사 일반과 소설을 가르는 가장 중요하고도 본질적인 요소는 언어다. 소설은 근대국가의 출현과 더불어 융성하게 된 근대적인 문학 장르인 만큼, 창작도 수용도 근대어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근대어란 근대국민국가가 국가다운 체제를 정립하기 위해 일부러 힘을 기울여 정착시키려고 한 새로운 언어를 뜻한다. 소설의 언어는 입말이 아니라 글말, 모어(母語 • 지역어, 사투리)가 아니라 표준어를 전제로 삼는다.
근대 이전의 서사는 공동체라는 좁은 세계를 염두에 둔 이야기로서 공동체에 속한 성원들 사이에서만 통용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전라도 지방의 서사가 경상도나 함경도 사람들처럼 이질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독자에게 침투해 전국적인 서사로 발전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웠다(엄밀하게 따지자면 근대 이전에는 근대국가가 없었으므로 ‘전국’이라는 말도 어불성설이지만).
그러나 근대 유럽에서 발전한 소설이라는 문학 형식은 지역이나 공동체의 경계를 넘어 계층, 성별, 언어를 달리하는 이질적인 독자를 대상으로 삼는다. 이광수의 <무정>이 <매일신보>라는 신문 매체를 타고 조선 전역을 아우르는 독자의 사랑을 받은 현상이야말로 소설의 근대성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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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번역 가능성
서사는 독자가 자연스럽게 몸으로 익힌 모어를 통해 창작과 수용이 이루어지는 데 비해, 소설은 그 매개하는 언어가 근대 학교교육을 통해 익힌 글말과 표준어라는 점에서 독자의 모어가 아니다. 이광수의 <무정>에 쓰인 언어는 전라도 사람이나 평안도 사람에게 자연스러운 언어가 아니었던 것이다.
소설을 통해 각각 상이한 공동체의 경계를 넘어 똑같은 언어로 똑같은 작품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근대적 현상은 무척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한 나라의 작품을 다른 국가의 언어로 번역해 함께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오늘날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외국 소설을 번역해서 읽고 있기 때문에 소설은 으레 번역할 수 있는 텍스트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한국의 독자는 고전의 반열에 올라선 프랑스 소설 <레미제라블>을 번역해 읽고 감동을 느끼며 세계적인 명작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근대 이전의 서사는 결코 번역이라는 문제를 제기하기 않았다. 소설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던 중세문학이 번역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직접 수용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언어와 문화를 달리하는 사람들이 똑같은 작품을 읽는다는 것이 얼마나 새롭고 신기한 일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의 번역 가능성은 소설이 지닌 근대성, 세계성을 나타낸다.
근대국가 형성에 기여한 소설소설이 유독 근대에 들어와 흥성하게 된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인쇄나 제지 같은 책 만드는 기술의 발달도 큰 몫을 했다. 근대 이전의 서사는 주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구전문학으로 존재했다. 문자로 쓰인 텍스트라 하더라도 대량으로 복사하고 제본해 책으로 내기에는 많은 한계가 따랐다.
그러나 근대 과학문명의 발달로 인해 책 만드는 기술이 괄목할 만큼 발전하면서 책은 대량으로 유통되기 시작했다. 책을 찍어내려면 종이, 잉크 같은 재료가 필요하며, 인쇄기, 제본기 같은 설비를 갖추기 위한 자본이 필수적이다. 또한 상품으로 제작한 책을 국내뿐 아니라 국제 시장에 광범위하게 유통시키기 위한 시스템도 있어야 한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상상의 공동체 :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성찰>에서 근대어(문자)와 인쇄자본주의(Print-capitalism)야말로 근대국민국가와 민족의식의 형성을 촉진시킨 일등공신이라고 주장한다.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자각이 공동체 의식을 자극하여 상상 속의 공동체를 구성했다는 것이다.
소설은 인쇄자본주의의 물결을 타고 근대문학의 대표 장르로 떠올랐다. 근대교육은 ‘국어’를 가르쳤고, ‘국어’를 배운 독자들은 ‘국어’로 쓴 소설을 읽었다. 모든 소설이 내셔널리즘에 물들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근대국가의 국민이 내셔널리즘을 내면화하는 데에 소설은 중대한 역할을 해냈다.
신의 자리에서 세계를 창조하다
서사든 소설이든, 상상력을 통해 현실을 재구성하고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하는 작업이라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이 중에서 소설의 시점과 세계 창조는 특별히 연관이 깊다.
머릿속에 구상한 세계를 소설 속에 옮겨놓을 때 소설의 시점은 세계를 위(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곳에 머물러 있다. 신이 세상을 내려다보며 자신의 뜻대로 천지만물을 빚어내는 것처럼, 작가는 소설을 창작하면서 자기만의 세계를 쌓아올린다.
근대 서양에서 소설이 흥성하는 시점은 교묘하게도 신과 종교가 쇠퇴하는 때와 맞물려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인간이 소설을 통해 신 없는 세계에서 자기중심적으로 세계를 창조하게 된 일과 무관하지 않다.
소설은 신의 자리에서 세계를 창조한다. 어쩌면 인간중심주의를 완성한 근대적 인간의 이야기 본능은 오만불손하며 불온한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