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뇌의 기억, 몸의 기억
마음이나 생각 속에 어떤 모습, 사실, 지식, 경험 따위가 잊히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을 기억이라고 한다. 누구나 꼭꼭 여며서 간직해두고 싶은 기억이 점점 흐릿해져서는 망각의 저편으로 사라지거나, 잊고자 몸부림쳐도 잊히기는커녕 점점 더 또렷해지는 기억 때문에 괴로워한 적이 있을 것이다. 인간에 속한 능력이면서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기억은 운명의 엇갈림을 초래한다.
현대에 들어와 뇌과학의 발달로 인해 인간의 기억에 대한 지식이 풍부해졌다. 그러나 기억은 두뇌뿐 아니라 몸 전체로 하는 것이다. 어릴 적에 스케이트를 탈 줄 알았다면 성인이 될 때까지 오랫동안 스케이트를 타지 않았어도 금방 스케이트를 탈 수 있는데, 이런 것은 근육의 기억이라 할 만하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저 유명한 마들렌 과자의 장면에서도 근육(혀)의 기억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듯 기억을 두뇌작용으로 여기는 상식과는 달리, 기억을 담당하는 것은 두뇌라기보다 몸이다. 몸 전체가 기억의 기능을 갖고 있는 것이다. 몸으로 기억하는 행위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과정과 효과를 지닌다. 설령 똑같은 시공간 속에서 똑같은 체험을 했다 해도 기억의 내용은 각기 다르기 마련이다. 기억하는 주체가 다른 몸이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인간과 똑같은 방식으로 기억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드는 일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똑같은 기억이란 없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1950)이나 맥 라이언과 덴젤 워싱턴이 열연한 <커리지 언더 파이어>(1996)에 나오는 것처럼, 동일한 사건을 놓고서도 당사자에 따라 기억의 내용이 완전히 달라지는 사태는 어느 정도 당연한 일이다. 누구든지 자신이 처한 처지에서 아전인수 격으로 과거를 기억하고 증언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기억이 제각각이라는 점은 동일한 주체, 즉 한 사람일 경우에도 다르지 않다. 기억하는 주체가 같은 몸이라도 그 사람이 놓여 있는 시공간은 한 순간도 똑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려서 어머니를 여읜 사람이라도 유년기 때 기억하는 어머니와 사춘기 때 기억하는 어머니는 모습도 다를 뿐 아니라 기억나는 내용도 다를 것이다. 또한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기억하는 어머니와 혼자 있을 때처럼 기억하는 어머니처럼 기억의 장소와 기회에 따라서도 그 내용은 필시 달라진다.
한편, 첫 해외여행에서 경험한 즐거운 일을 기억하는 것과 1443년 세종대왕의 한글창제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같을 수는 없다. 나아가 9.11테러 같은 엄청난 참사를 직접 몸으로 기억하는 일과 미디어나 책을 통해 기억하는 일은 하늘과 땅 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몸의 기억, 즉 체험을 통한 기억은 과거에 있었던 일을 단순하게 반복적으로 환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마다 새로운 해석을 곁들여 재구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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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재구성기억의 재구성이란 무엇일까. 예를 들어 첫 해외여행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때, 거기에는 여행을 떠난 계절, 동행했던 사람, 여정에서 마주친 사람과 풍경 등 엄청난 수의 상황과 조건이 마치 세포가 번식하듯이 들러붙는다. 기억을 할 때마다 기억을 재구성하는 요소가 무한하게 가지를 치는 것이다. 요컨대 지식이나 정보로 기억하는 내용은 반드시 재구성을 요하지 않지만, 자기 몸을 통한 기억에는 재구성의 과정이 필수적이다.
자폐증 환자 가운데는 엄청난 기억력의 소유자가 있다. 영화 <말아톤>(2005)이나 <레인맨> (1988)의 주인공들은 엄청난 양의 정보를 스펀지처럼 통째로 흡수해버린다. 가히 컴퓨터 같은 기계에 비견할 만한데, 그도 그럴 것이 그러한 기억 행위에는 감정의 움직임이 일어나지 않는다.
기억은 몸을 통해 행해지고 재구성되지만, 그와 동시에 몸 또한 기억을 통해 변화를 겪는다. 즐거운 일을 기억할 때는 미소가 떠오르지만 억울한 일을 기억할 때는 가슴이 답답하고 혈압이 올라간다. 그러나 정보나 언어로만 이루어지는 기억에는 이러한 몸의 변화가 그다지 일어나지 않는다. 즉, 몸이 관여하는 기억과 그렇지 않은 기억은 차원이 매우 다르다.
기억은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이제는 일본 한류(韓流)의 영웅이 된 배우 배용준이 KBS 드라마 <겨울연가>(2002)에서 맡은 역할은 기억상실증에 걸린 젊은이였다. 지워진 기억 때문에 과거의 자신이 누구였으며 그 때문에 현재의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된 그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이렇게 묻는다. “도대체 나는 누구입니까?”
기억을 잃으면 정체성도 없어져버린다. 자기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은 일종의 공포다. <본 아이덴티티>(2002), <토탈리콜>(1989), <블레이드러너>(1982) 같은 영화는 자신의 정체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위험과 불안이 얼마나 막대한지 묘사한다.
기억의 상실이나 혼란, 즉 기억을 재구성할 수 없는 상태에서는 자아동일성을 확보할 수 없다. 자기가 누군지 모르면 현실 위에 발을 딛고 설 수 없게 된다. 다시 말해 기억의 행위, 즉 기억의 재구성은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우리 안의 이야기 본능’(서사 : 소설, 새교육 9월호)에서 서술했듯이, 인간은 기억의 서사를 매끄럽게 구성하지 못하는 경우 정체성 혼란으로 고통을 겪는다.
‘살인의 추억’이 내뿜는 역설
그렇다면 기억에 비해 추억은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을까. 사전풀이에 따르면 추억이란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함. 또는 그런 생각’(표준국어대사전)이지만, 실제 생활에서 추억이란 기억하고 있는 것 가운데 즐겁고 그리우며 반가운 것만을 가리킨다. 이렇듯 기억에 비해 추억은 한정된 의미를 지니기에 기억의 부분집합에 해당한다. 추억의 명화, 추억의 가요 등 추억에는 오로지 아스라이 사라져가는 과거에 대한 무한한 동경과 향수가 담겨 있을 뿐이다. 따라서 무의식의 차원에서 작동해 선택의 의지에 좌우되지 않는 기억과는 달리, 추억은 처음부터 아름답게 남기고 싶은 것만 자신의 의지대로 뽑아 올린 과거다.
예기치 않은 충격으로 자기와 관계 깊은 사실이나 어떤 시기에 있었던 일을 잊어버리는 병을 기억상실증이라고 한다. 기억 행위는 능력의 일종이기 때문에 장애가 일어날 수 있다. 반면, 추억은 능력이 아니므로 기억력에 상응하는 추억력이란 없다. 추억은 어디까지나 과거를 기억하여 남기는 것이므로 이야기로서의 추억담만이 존재한다. 추억에는 상실이라는 현상이 일어나지 않을뿐더러, 추억을 잊는 일은 자연스러운 망각이어서 상실의 고통을 안겨주지 않는다. 이미 상실한 기억은 추억이 될 수 없는 까닭이다.
이렇게 보면 ‘살인의 추억’이라는 표현이 풍기는 역설이 뚜렷하게 다가온다. 살인의 행위는 추억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부정적인 일임에도, 일부러 그것을 추억으로 전환시킴으로써 미궁에 빠진 살인사건의 복합적인 함축을 드러내고 있다.
기억을 지우면 ‘나’도 지워진다
‘살인의 추억’이 던지는 기묘한 인상은 결코 살인을 추억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는 피해자와 연관된다. 살인을 당한 쪽에서 보면 그것은 끔찍하고 잔인한 폭력의 기억으로서 몸과 마음에 새겨졌을 것이다. 따라서 피해자의 처지를 도외시하고 살인을 추억으로 포장하려는 자가 있다면, 그의 저의가 어디에 있는지 추궁해야 할 것이다. 역사에서는 추억할 수 없는 것을 추억으로 몰아가려는 망각의 정치가 늘 작동해왔다.
기억을 들여다보거나 원하는 대로 기억을 삭제한다는 설정은 신화와 SF장르에서 익숙한 제재다. 최근에는 고통의 기억을 선택적으로 지워주는 약물이 개발되었다고 하는데,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앓는 사람들에게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아픈 기억을 마음대로 도려낸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일까?
영화 <이터널 선샤인>(2004)에서 주인공들은 실연의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 아픈 기억만 지워준다는 회사를 찾아가 사랑의 기억을 지워버린다. 그러나 아픔의 시간을 잘라버린 그들에게 찾아온 것은 묘한 공허와 허탈의 느낌이었다. 불행한 기억을 지워버린 자리에는 자기 자신마저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기억은 정체성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어떤 것을 기억할 것인가는 곧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와 떼려야 뗄 수 없다. 기억의 소거는 곧바로 자기 부정으로 이어진다. 즉, 기억을 지우면 자기 자신도 지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