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를 외치는 사회
‘앞으로 앞으로’(윤석중 작사, 이수인 작곡)라는 동요가 있다. 지구는 둥그니까 앞으로 계속 걸어가면 온 세상 어린이를 다 만나고 올 수 있다는 내용이다. 세계화 시대를 이미 내다보기라고 한 듯, 맹랑하지만 밝고 명랑하고 진취적인 기상이 엿보인다. 시간과 공간, 개인과 사회, 물질과 정신을 막론하고, 앞으로 나아간다는 사고방식이 오늘날 추구해야 할 방향이라는 데 토를 다는 사람은 거의 없지 않을까. 어느새 긍정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사고방식이야말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중요한 가치관이라는 것이 사회적 신념이 되어버린 듯하다.
확실히 우리가 몸담고 있는 21세기는 진보를 지향한다. 진보는 사물이 점차 발달하는 것, 또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지만, 인간의 역사를 중심으로 그 뜻을 새겨보면 역사 발전의 합법칙성에 따라 사회의 변화나 발전을 추구하는 일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진보라는 관념은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역사의 발전을 추진해왔고 그렇게 해나갈 것이라는 인간주의(휴머니즘)적인 사고에 의거한다. ‘앞으로!’를 외치는 진보의 가치관은 신이 주관하는 역사에서 합리적 이성을 갖춘 인간 주체의 역사로 이행한 시대, 즉 근대세계의 탄생과 더불어 우리를 철저하게 점령해버린 것이다.

진화 개념의 본령은 생물학
어떤 일이나 사물 따위가 점점 발달해가는 것을 가리키는 또 다른 낱말로 진화가 있다. 이 낱말 뜻의 본령은 생물학이다. 뜻풀이에 발달, 발전 같은 단어가 들어 있는 만큼 진화 또한 진보와 더불어 ‘앞으로’ 나아가는 근대의 긍정적 가치관을 나타낸다. 주지하다시피 진화는 1859년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간되면서 근대 이후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다윈의 진화론의 핵심은 생물이 유전을 통해 세대마다 변하면서 그 안에 변화가 생기는데, 그중에 극단적인 변종이 축적되고 지속되는 가운데 중간 변종이 사멸함으로써 새로운 종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본래 진화의 개념은 문명이나 문화가 성립하기 이전의 역사, 즉 인간의 역사보다는 자연과 우주의 역사와 관련이 깊다. 진화 속에는 우주의 탄생, 생명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몇 억 광년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진화라는 관념이 생겨남으로써, 단세포동물이 세포 분열을 통해 고등동물까지 발전하고, 그 결과의 하나로 인간이 지구상에 출현할 수 있었다는 인류의 기원을 설명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
자연의 진화에서 사회의 진화로진화는 생물학적 개념이지만 워낙 학문과 세계관에 강한 충격을 가한 만큼, 진보보다 훨씬 포괄적인 용어로 발전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회진화론이다. 다윈은 진화론을 인간 사회에 적용하지 않았지만, 그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은 19세기 사회과학자들은 생물의 진화 개념을 발전이라는 관념에 투영해 사회에 적용했다. 그리하여 생물과 마찬가지로 사회도 동질적인 것에서 이질적인 것으로, 미분화 상태에서 분화 상태로 나아간다는 사회진화론이 성립했다.
이처럼 자연의 진화를 설명하는 생명진화론을 인간 사회에 적용한 사회진화론은 ‘사회다위니즘’이라고도 불린다. 이 이론을 제창한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는 사회를 일종의 유기체로 보면서, 자연도태에 비견되는 사회도태가 사회생활의 모든 차원에서 진보의 불가피한 원동력이라고 간주했다.
자연의 진화에서 사회의 진화로 옮아간 사회진화론은 실로 인간 사회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방식에 엄청난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사회진화론의 핵심은 ‘힘이 곧 정의’라는 사상이다. 자연계의 필연적인 인과법칙으로 여겨진 진화가 인간사회에서는 문명화라는 개념으로 탈바꿈했고, 이로써 근대에 들어와 문명과 야만, 발전과 정체 혹은 사멸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은 진화론의 틀을 통해 역사 인식 전반을 지배하게 되었다.
진화라는 강박관념오늘날 진화의 개념에 기대어 사회현상을 설명하고 이해하려는 경향은 자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널리 퍼져 있다. 이미 19세기에 신문이나 잡지에 실린 화장품 광고에서는 아름답고 매끄러운 피부를 선망하는 여성들의 구매력을 자극하기 위해 진화론과 유전학을 동원한다. 예를 들면 살결이 고와진 부부 사이에서 더욱 잘생긴 아이가 태어나기 때문에 화장품을 발라야 한다는 식이다.
특히 다윈 자신의 표현이 아니었음에도 스펜서에 의해 널리 퍼진 ‘적자생존의 법칙’에 의해 자본주의적 자유경쟁 속에서 자본가가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것을 당연한 결과로 여기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강한 자가 승리하고 약한 자가 패한다는 우승열패의 논리에서는 자본가에게 그 어떤 윤리적 책임의식도 추궁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청년실업이 커다란 사회문제로 부상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시대에 경쟁에 의한 적자생존이라는 말은 그 어느 때보다 현대인의 심리를 옥죄고 있다.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한 한국사회에서 남보다 앞서나가야 하고 남보다 위쪽 서열을 차지해야 한다는 생각은 이제 지상의 과제처럼 되어버렸다. 현대사회가 누구나 강자를 꿈꾸고 약자를 짓밟는 것이 당연한 ‘못된 세상’으로 전락한 까닭을 사회진화론에서 찾는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닐 것이다.
진화론과 제국주의적 침략
한국사회에 진화론이 들어온 구한말은 일찍이 근대문명을 이룩한 서구열강이 물리력을 통해 전근대사회를 지배하고자 한 제국주의시대였다. 서구를 모델로 삼아 근대화를 추진하고자 했던 당시의 지식인들은 중국의 지식인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를 통해 진화론을 수용했다. 한국뿐 아니라 일본, 중국 등 근대화적 지향에 열중한 나라들에서는 예외 없이 진화론이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심지어 오늘날 근대화를 지향하는 다른 나라에서도 이러한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런데 문명을 향해 진보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라고 주장하는 사회진화론은 필연적으로 제국의 패권주의나 식민지 침략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귀결된다. 민족, 종족, 인종을 둘러싼 근대 초기의 텍스트에서는 문명이 발달한 민족과 그렇지 못한 민족이라는 차별구조를 사회진화론의 우열 관계에 의해 설명하고 있다.
어떤 민족이나 인종, 부족이 세력을 잃고 쇠퇴하거나 멸망하는 일을 진화론적 인과관계로 설명하게 되면, 그 원인이 제국주의의 폭력과 억압이 아니라 이들이 미개하고 저발전 상태였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합병해 식민통치를 시행할 때도 이 사회진화론을 활용했음은 물론이다.
진보의 주체는 인간
생물의 진화, 사회의 진화가 아무리 낮은 수준에서 높은 수준으로 유기체나 사회가 발전하는 것을 상정한다고 해도, 이때 진화를 주관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다. 예를 들어 침팬지 같은 유인원이 어떻게 인간으로 진화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어떻게 보면 진화의 주체는 자연이나 신이 될는지도 모르며, 인간은 단지 진화의 대상일 뿐이다.
한편, 과학기술의 진보, 사회의 진보, 물질적 진보, 진보적 사상 등 진보와 어울리는 낱말들을 떠올려보면, 모두 인간의 정신이나 손이 닿는 대상임을 알 수 있다. 요컨대 진보란 어디까지나 인간이 주체로서 행하는 행위의 일종이며,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역사에 가장 어울리는 말일 수 있다. 벌집 건축의 진보, 우주의 진보, 동물적 진보 같은 예를 보더라도, 동물이나 사물이 이루어내는 일을 가리켜 진보라는 말을 쓰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진보정당, 진보 세력, 진보 학회, 진보 진영 등등, 정치적 성향이나 당파의 이름에 진화가 아니라 진보가 붙는 것을 보더라도, 진보란 인간의 독점물이다.
진(進)은 과연 절대 선(善)일까?
인간은 자신이 속한 환경에 오로지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과 맞서 싸우고 악조건을 극복한다는 점에서 동물과 다르다. 과연 인간의 문명과 문화를 창달하는 데 진화와 진보는 필수 불가결한 요인일 것이다. 하지만 근대 이후 진보나 진화처럼 ‘앞으로’를 외치는 사고방식이 군림하면서 제국주의적 약육강식과 자본주의적 적자생존이 판치게 된 것도 사실이다.
단순한 구조에서 복잡한 구조로, 하등한 것에서 고등한 것으로 진행된다는 진화의 방향은 과연 발전이며 발달일까? 진화와 진보에는 모두 나아갈 진(進) 자가 들어 있는데, 과연 ‘앞으로’ 나아가는 진(進)을 절대 선(善)으로 볼 수 있을까? 여기에는 근대의 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깔려 있다. 21세기에 근대가 이룩한 거대한 문명을 되돌아보면서 ‘앞으로’라는 방향도 좋지만, 때로는 ‘뒤로’나 ‘옆으로’도 좋을 수 있고, ‘뱅뱅 도는’ 순환도 유의미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