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과 서양을 지도 위에 나타낸다면? 웬만한 사람이라면 동양과 서양이 무슨 뜻인지 그다지 어렵지 않게 대답을 해낼 것이다. 그렇다면 동양과 서양이 각각 어디를 일컫는지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색칠을 하게 해보면 어떨까? 동양은 중국과 인도를 중심으로 한 아시아 지역, 서양은 유럽과 아메리카 지역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도, 막상 거기에 걸맞은 지도를 시각적으로 확실하게 그리는 일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과연 어디를 동양이라 하고 어디를 서양이라 확정할 수 있을까. 아프리카 대륙은 동양인가 서양인가? 호주는 또 어떤가? 동양과 서양은 인류가 품어온 강력한 지리적 심상 중 하나임에 틀림없지만, 이런 반론에 부딪히는 순간 동양과 서양이라는 상식적 개념은 매우 상대적이고 유동적인 것으로 다가온다. 오늘날의 지도와는 사뭇 다른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요상한 중세의 지도에서 알 수 있듯이, 지리적 인식과 감각은 그 사회의 세계관과 우주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도란 머릿속에 그려놓은 지리적인 이미지를 단지 종이 위에 옮겨놓은 것에 불과하다. 과학과 문명의 발달로 인해 거리의 측량 방법과 지도 작법이 끊임없이 개선을 거듭하고 있고, 이른바 ‘정확한’ 지도에 대한 추구도 더욱 치열해졌지만, 우리 마음속에는 자신이 살고 있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에 대한 주관적이고 정서적인 지도가 그려져 있는 것이다.
서쪽이 중심이 되어버린 세계 동양과 서양은 양(洋), 즉 바다를 기준으로 세계를 동서로 나눈 것인데, 힘센 서양이 동양으로 진출함에 따라 서양 중심적인 세계질서가 형성되었다. 제국주의 시대에 서양은 ‘보는 자’, ‘행하는 자’처럼 주체가 되었지만, 동양은 서양의 시선에 노출되거나 그 행위의 작용을 받는 대상이라는 위계가 성립해버린 것이다. 동구와 서구라는 말에서 서쪽이 주도권을 쥐고 있음을 극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동구라파와 서구라파, 즉 유럽을 한자로 표기한 구라파(歐羅巴)에 동(東)과 서(西)를 붙여 만든 말이지만, 이 가운데 서구는 서양을 이루는 유럽과 북아메리카를 아우르는 뜻으로 진화함으로써 서유럽과 미국이 대표적인 선진국이자 서구 세계의 중심임을 나타내게 되었다. 이로써 서구식 생활, 서구적 가치, 서구화, 서구중심주의 등등 서구라는 낱말은 특정한 지역을 뛰어넘어 세계를 대표하는 개념으로 우뚝 올라서게 되었다. 동구는 감히 서구의 위세를 넘볼 수 없는 지경이 된 것이다. 따라서 서구(서양이나 서방이 아니다) 중심적인 가치관에 입각해 동양과 서양의 구분에 임할 때, 중심=서양, 주변=동양이라는 등식이 언제나 전제로 깔려 있다. 한마디로 동양은 “세계에서 서양이 아닌 지역”(연세한국어사전), 즉 ‘서양을 뺀 나머지’를 차지하는 것이다. 어쩌다가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동양과 서양의 어색한 만남 동과 서는 예부터 서로 만나고 충돌하는 문명을 대표해왔다. 한편으로는 서로를 낯설고 어울릴 수 없는 타자 혹은 이방인으로 규정해 적대감을 드높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상생(相生)을 도모해야 할 이웃이자 동반자로서 우애와 교류를 강조해왔다. 이러한 양가적인 감정은 오랜 역사 속에 뿌리 내리고 있을 테지만, 역사적 위기에 맞닥뜨릴 때 더욱 강렬하게 나타나곤 한다. 특히 근대 이후의 세계사는 ‘문명’의 이름으로 ‘서구화’라는 폭력을 휘두른 서양의 제국주의적 침탈로 얼룩짐으로써, 동서양의 문명충돌에서 서양이 일방적인 승리를 거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힘의 우열을 바탕으로 강자와 약자, 승자와 패자 등으로 양분되는 관계 속에서 양측의 화기애애한 만남이 가능할 리 없다. 동양에서 서양 붐이 그다지 일어나지 않았던 데 비해, 서양에서는 종종 동양의 매혹에 깊이 빠지곤 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서양에서 동양을 찬양하고 우러르면서 동경의 대상으로 미화하고 동양을 이상향으로 떠받들면서 모방에 열을 올리던 시기야말로 바로 서양의 군사적, 경제적 권력이 급속하게 뻗어나간 때였다는 사실이다. 동양을 마치 통찰과 영감을 주는 근원의 땅, 신비로움과 정신성으로 가득 찬 세계, 시간이 멈춘 꿈의 나라, 숭고하며 초월적인 장소 등등…. 낭만적인 메타포로써 동양의 이미지에 대해 환상을 부풀리면 부풀릴수록, 동양에 대한 식민지적 착취라는 추악한 현실은 역설적인 정당성을 획득했던 것이다.
동양은 여성, 서양은 남성? 동양과 서양의 역관계를 상기할 때, 서로를 상호 보완적이면서도 합치할 수 없는 이원성으로 바라보면서 ‘동양과 서양의 결혼’이라는 낭만적 메시지를 내걸었던 옛 사상가들이 허무맹랑하게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런데 동양과 서양의 충돌과 대립 속에서 동양은 서양에 의해 여성이라는 젠더를 획득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동서양이 결혼을 한다면 어느 쪽이 신랑이고 어느 쪽이 신부가 될 것인가. 서양이 스스로를 이성적이고 능동적인 남성으로 표상함에 따라 그 상대라는 위치에서 동양은 비이성적이고 수동적인 여성의 자리에 놓인다. 더구나 제국주의 시대에 들어와 동양은 서양의 억압과 강요에 못 이겨 ‘서구’라는 이질적인 세계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비극적 존재, 문명의 세례를 받아야 하는 미개와 야만이라는 이미지를 뒤집어쓰게 된다. 이리하여 세계의 리더인 서양 앞에서 동양은 뛰어난 서양의 통제를 받아야 하는 열등하고 유약한 배우자의 역할을 떠맡는다.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 부인>은 이러한 동양과 서양의 만남을 여성과 남성의 그것으로 환치해 형상화해낸 전형적인 작품 중 하나다. 이 작품에서 남성(=서양)을 온전히 사랑하며 처절하게 기다리는 여성(=동양)은 순정과 절개를 지닌 매혹적인 인물이지만, 결국에는 남성에게 버림받는 무기력한 여성일 뿐인데, 이들 남녀의 형상이야말로 동양과 서양의 관계를 연상할 때 작용하는 전형적인 고정관념이다.
보편이고자 하는 동서양의 욕망 서양이 스스로 세계의 중심이자 지도자로 등극하면서 문명, 과학, 근대, 진화 같은 서구적 가치관이야말로 누구나 추구해야 할 유일한 가치처럼 여겨지기 시작한다. 즉, 서양은 자신의 힘을 바탕으로 인류 전체를 대표하면서 ‘보편’을 표상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서양은 보편주의라는 미명 아래 유럽이 생산해낸 가치를 강제함으로써 지역적 특수성을 말살해버렸다고 할 수 있다. 식민지화의 본질은 여기에 있다. 근대적인 물질문명은 기나긴 역사 속에서 하나의 특수한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것이 마치 온 인류의 보편적인 심성인 것처럼 확대 규정해 누구에게나 강제하는 것이 바로 근대화론의 논리 구조라 할 것이다. 오늘날 서구적 근대화가 초래한 비극과 문제점은 보편의 이름으로 자행된 독선과 횡포로 인해 나타난 것이다. 민주주의 역시 마찬가지다. 민주주의를 인류의 보편적인 심성(자유와 평등)에 따른 인간 본원의 정치체제라고 규정하는 것 자체가 서구 중심적인 사고인 것이다. 그렇기에 미국은 민주주의를 빌미로 이라크를 침공할 수 있었고, 그 때문에 수많은 이라크 시민이 무고하게 죽어갔던 것이다. 서양이 보편의 자리를 독점하려는 데 대해 대항한 세력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일본이었다. 19세기 말 아시아의 여러 나라보다 앞서 근대화를 추진했던 메이지유신 때, 스스로 아시아가 아니라고 극구 부정했던 일본은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일으킬 즈음에는 보편으로 상정되어온 서양에 대항하기 위해 동양이 새로운 보편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말할 것도 없이 그 동양의 선두 자리는 일본 차지였다.
돌고 도는 동양과 서양 앞에서 동양과 서양을 지도상에 표시하는 일이 곤혹스럽다는 사실은 동양과 서양이 때에 따라 매우 다변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를테면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수행하면서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외쳤을 때 일본은 스스로를 아시아가 아니라 유럽과 동일시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도 줄곧 일본=유럽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해왔다. 그래서 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서는 일본이 아시아의 일원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곤 한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한강의 기적’으로 놀라운 산업화와 근대화의 결실을 맺은 한국 역시 스스로를 서구, 서양, 유럽으로 여기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선진국 대열에 들기 위해 매진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서양과 동일시하며, 또는 한국보다 저발전 수준에 있는 나라 혹은 그 나라 사람들에게 마치 서양의 위치에 서 있는 듯이 행동하는 모습 등이 그러하다. 아시아에 위치한다고 해서 동양이라고 일방적으로 단정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때그때 정세의 변화에 따라 스스로를 동양으로도 서양으로도 표상하기 때문이다. 동양과 서양은 결코 지도 위에 존재하지 않는다. 내 마음의 지도 위에만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