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의 두 가지 뜻
지방의 뜻은 사전적으로 풀이할 때 두 가지 결로 나뉜다. 하나는 행정 구획이나 다른 특징으로 구분되는 일정한 지역이고, 또 하나는 한 나라의 수도 바깥에 위치한 지역이다. 전자의 의미에는 차등의 시선이 담겨 있지 않지만, 서울 이외의 지역 또는 아랫단위의 기구나 조직을 일컫는 후자의 의미에는 서울과 지방의 차이가 분명히 드러난다. 지금 한국사회에 만연한 서울중심주의를 떠올려보면 지방을 낮추어 본다는 뜻을 더욱 현실감 있게 느낄 수 있다.
국가를 세우고 도시를 건설해온 인간의 역사는 서울(수도)과 지방이라는 양극 구도를 낳았다. 예로부터 지방을 가리키는 ‘향(鄕)’ 또는 ‘촌(村)’은 ‘경(京)’과 대비를 이루었으니, 전근대 시대부터 지방은 권력의 중심부가 아닌 곳, 즉 중심에서 벗어나 있는 모든 곳을 통칭했다. 요컨대 지방이라는 말에는 이미 중앙을 중심에 놓는 사고방식과 시선이 오롯이 깃들어 있는 셈이다.
오늘날 서울과 그 나머지인 지방 사이에는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서울‘특별’시민이라는 말을 비꼬는 의미로 사용하거나 서울을 ‘나라의 심장부’라고 비유하는 일은 그리 드물지 않다. 그리하여 서울이라는 지리적 경계 안에서는 우월감, 발전, 특권, 부(富) 같은 가치가 활보하는 반면, 경계 바깥에 위치하는 지방에는 문명과 야만이라는 근대화의 도식에 따라 저열함, 퇴보, 결핍 같은 차별의 시선이 쏟아진다.
지방에서 지역으로
이에 비해 지역은 일정한 구획을 지닌 토지나 특정한 공간 영역을 가리키는데, 지방에 비해 그 함의가 훨씬 포괄적이다. 지역에는 지구 표면 위의 대지와 바다를 어떤 특정한 목적에 입각해 구분한다는 의미가 강하다. 특히 서울과 쌍을 이룰 수밖에 없는 지방에 비해, 지역은 사회과학 같은 학술 분야에서 동질적인 특징을 지닌 지구(地區)를 가리키기 때문에 중립성이 강한 용어다. 그런 면에서 서울 또한 수도든 아니든 하나의 지역임에는 틀림없다.
지역은 강이나 산맥 같은 자연환경에 의해 나뉘기도 하지만, 행정, 정치, 역사, 문화의 동질성이 지역을 가르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즉, 지역을 나누는 의도에 따라 자연적 지역과 인문적 지역으로 나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자연적 요소와 인문적 요소가 어우러진 특색을 바탕으로 일정한 유기체적 성격을 드러내는 곳이야말로 참다운 지리학적 지역이라 할 수 있겠다.
이제까지 근대화 발전의 중심은 대도시, 특히 메트로폴리탄 서울에 집중되었고, 그 결과 불균등발전이라는 역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이에 대한 반성을 바탕으로 오늘날에는 서울과 지방의 격차를 해소하는 동시에 지역의 고유한 특성을 통해 발전을 꾀하자는 움직임이 점점 힘을 얻고 있다. 지방선거와 지방자치의 과제는 실로 ‘지방’을 극복하고 ‘지역성’을 적극 살려내는 데 있는 것이다.

지역감정은 부정적일까?
자신이 태어나 자라난 곳에 애착을 갖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일 것이다. 세계문학을 예로 들더라도 어떤 지방의 자연환경, 인정, 방언, 관습, 풍속, 정서 같은 고유한 특색을 세밀하게 묘사해 풍부한 지방색을 자랑하는 작품이 독자의 사랑을 받아왔다. <테스(Tess of the d'Urbervilles)>의 작가로 유명한 영국의 토머스 하디(Thomas Hardy)가 그러하고, <봄봄>, <동백꽃>과 같이 향토색이 물씬 배어 있는 작품으로 각광을 받은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작가 김유정이 그러하다.
그러나 동질성에 바탕을 둔 지역 개념은 권력의 작용에 의해 적대와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근거가 될 수도 있다. 이는 숱한 역사적 사건이 증언하고 있다. 특정 지방에 대한 편견의 시선이 조장하는 지역감정은 그대로 차별의 ‘수단’이 된다. 한국의 현대정치사에서 지역감정은 국가적 단결과 통합력을 해치는 요소로서 배척을 당해왔지만, 동시에 선거가 치러질 때마다 가장 원초적인 호소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끈질기게 맡아왔다.
문제는 지역감정이 어디에서 비롯되어 어떤 식으로 지역대립을 일으키느냐 하는 것이다. 한국의 근대화 과정은 고향에 대한 자부심, 친근감, 애착 같은 전통적인 감정을 약화시켰을 뿐 아니라, 지역감정을 정치현장에 동원함으로써 타지방에 대한 열등감이나 공격성을 부추겨왔다.
누구를 위한 지역주의인가
지역감정 이야기와 더불어 한국사회의 지역주의에 대해서도 한번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선거 때마다 영남과 호남의 대결구도가 아주 작은 산골마을에조차 영향을 미쳐서, 지역감정에 따라 정치 판세가 확연하게 갈리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지역주의가 한국사회에 옛날부터 있어온 고질병인 듯 취급한다. 그러다 보니 지역주의가 무엇이며 그것이 왜 옳지 않은지는 따져 묻지 않으면서도, 지역주의 자체를 정치 문제의 핵심으로 치부한다. 그러나 세상의 상식이나 개념, 전통 중에는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 조작 또는 날조된 것이 허다한 것처럼, 한국의 지역주의도 꽤 자의적인 관념에 불과하다.
한국의 지역주의에서는 ‘영남’이나 ‘호남’이라는 옛날식 지역 개념을 주로 사용한다. 그런데 어째서 이 지역들에만 고색창연한 이름을 계속 쓰는 것일까? 옛날식 명칭을 고수하면 두 지역의 대립이 전근대, 혹은 그 이전에까지 뿌리내리고 있다는 관념을 불어넣기 쉽기 때문이 아닐까? 충청남도 금산이나 논산은 과거 그 지역의 일부가 전라도와 겹치는데도, 오늘날 그 지역은 스스로를 충청이라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런 점은 지역이라는 관념 자체가 무척 유동적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지역주의’는 한국의 정치인들이 정치적 당면 문제를 회피하는 데 바람막이 역할을 하는 데도 활용되고 있다. 민감한 정치 사안에 대해 여론이 들끓거나 집권당과 정부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지도자들은 국민의 단결과 국가 통합을 위해 ‘지역주의와 같은 구조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논리를 종종 내세워왔다.
호남에 대한 편견의 뿌리
지구상의 나라들을 나란히 놓고 견주어볼 때 한국은 언어, 인종, 문화, 역사, 경제 등 제 분야에서 그다지 차이가 두드러지지 않는 나라에 속한다. 보통 다른 나라에서 지역주의를 정치적으로 동원할 때는 분리나 자치를 지향하는 운동으로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한국에는 그러한 움직임을 드러낼 만큼 중앙과 독립적인 권력을 갖춘 지역공동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한국의 지역주의는 그 어떤 지역적 분리보다 심각하고 첨예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지역 갈등의 중심에 놓여 있는 곳은 ‘호남’지방이다. 이곳에 편견과 차별의 시선이 가장 집중된 시기는 박정희 정권의 통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명 개발독재라고 일컫는 권위주의적 근대화 속에서 호남 출신에 대한 편견과 악평이 조성되었고, 이러한 분위기가 영남지방을 지지 기반으로 삼아 권력을 유지하고 지속하고자 했던 정권의 욕구와 맞물림으로써 확산되었던 것이다.
사실 호남과 영남, 또는 호남과 호남 아닌 지역 사이에 어떤 구분이 생겨날 필연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급격한 도시화와 계급분화 속에서 호남 출신은 소외와 기피의 대상이 되어갔고, 그것이 서울과 지방, 중앙과 주변 사이에 우열과 상하라는 위계적인 틈을 만들어냈다. 이리하여 호남에 대한 편견은 마치 오랜 역사적 기원을 갖는 뿌리 깊은 것처럼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미래 지향적인 지방과 지역 개념지방은 본디 땅(地)+모(方)가 모인 단어로, 풀이하자면 땅 귀퉁이라는 뜻이다. 본래적인 의미로 보면 어디에 위치한 땅이든 모두 ‘지방’이 아닐 수 없다. 즉, 모든 지방은 평등하다. 지방자치는 바로 민주주의에 입각한 지방 사이의 평등과 자율성, 독립성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지방자치 정신의 실현이야말로 뒤틀린 지역주의를 바로잡고, 진정한 지역주의의 길을 열 수 있다. 참된 지역주의는 기존 지역감정의 부정성을 벗어버리고 중앙권력의 일방적인 지배에 대항하는 건강성을 되찾는 데 있다.
아무리 국가에 포섭된 하위 단위라 하더라도, 지방이나 지역은 일국의 내셔널리즘에 안주하기보다 그 틀을 벗어난 삶의 구체적인 공간이 되어야 한다.
지리적 영역으로 구획되는 지방 개념이 스스로의 독자적인 역사와 생명력을 지닌 지역 개념과 어우러질 때, 다시 말해 지방과 지역이 국가나 제국의 일부가 아니라 삶과 역사를 일궈내는 독립적인 단위가 될 때, 미래 지향적인 지방과 지역 개념을 향한 전망은 열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