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35년 9개월 동안 몸담아 온 이화여대에서 퇴임한 김숙희 전 교육부 장관은 작년 10월 '가정을 건강하게 하는 시민의 모임'(이하 '가건모')을 결성하는 등 더욱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내 아이만 앞세우려는 가족이기주의, 천민자본주의로만 치닫는 '돈의 정신'을 바로잡지 않으면 가정의 해체는 가속화될 수밖에 없다"는 김 전 장관은 "모(母)집단인 가정의 안위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기에 공교육도, 국가도 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진단한다. 2004년 새해를 여는 키워드, '건강한 가정'은 어떻게 만들어나가야 할지, 김숙희 가건모 회장의 입을 통해 들어봤다.
"최근 뉴스들만 접하면 가슴이 답답하지 않나요. 가족 동반자살은 끊이질 않고, 부모가 자식을 강물에 집어던지지를 않나, 카드 빚에, 가계부채는 끊임없지 증가하지요. 이혼율은 세계 2위라고 하죠, 저 출산에 원정출산까지…. 어휴, 한도 끝도 없어요. 그런데 우리 사회 가정이 이지경이 될
때까지 그동안 아무도, 아무런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잖아요. 이유는 간단해요. 어떠한 교육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이화여대 재직 36년, 사회 활동 30년(YWCA에 몸담았던 기간. 가정학회장(1980)과 교육부장관 재직 기간(1993)은 여기에 포함된다고 설명한다), 세계 영양학회 32년.' 스스로가 그려 보이는 인생 축약도 만큼이나 김숙희 가건모 회장(66)은 가정의 총체적 붕괴 이유도 단순 명료하게 정의한다. 또박또박 정제된 말투를 닮았을까, 군더더기라곤 찾을 수 없다. 이화여대 가정대 명예교수, 호서대 출강, 한국식품영양재단 이사장으로 활동하느라 쉴 틈이 없지만 김 회장이 '가건모' 일에 무엇보다 공을 들이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가건모는 21세기 판 '가정 신문화'운동이에요. 지금껏 가정학이 식생활, 의생활, 육아, 가정 경제 관리 등의 좁은 틀 안에서만 활동해왔다는 자기 반성에서부터 시작됐지요. 전국 가정대학 교수진과 동문, 일반시민 등 400여명이 함께 준비해 작년 10월 창립했고, 그동안 이성교제·결혼·출산·양육뿐 아니라 예비 은퇴자를 위한 가정생활 적응까지 포괄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하기 위한 준비를 했어요. 그런데, 엉뚱한 데서 딴죽걸기가 들어옵디다."
가건모의 사업을 충실히 실행할 '건강가정관리사'법 제정이 난항에 부딪치게 된 것이다. '사회복지사'들이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진다며 법 제정에 반대를 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여기서도 예외 없이 보게되더군요. 자신의 이익에 조금이라도 손해가 된다싶으면 한 치의 양보도 못하는 편협함과 옹졸함 말입니다. 그동안 가정이 와해될 때까지 손놓고 있던 그들이 말입니다-. 아무튼, 설득과 타협을 거쳐 현재 어렵게 국회 소위를 거쳐 법사위에 상정돼 있습니다. 법이 통과되면 구체적인 활동에 들어갈 수 있겠지요."
"행사보다는 가치관을 수립해 나가는 작업을 해나갈 것"이라고도 말했다. "먼저 '돈의 정신'을 찾아 주는 것부터 해야할 겁니다. 얼마 전 신혼부부 설문조사 결과를 보니 앞으로 살아가려면 100억이 필요하다고 하고, 65세 이후 노후를 위해서는 5억은 가져야 한다고들 합디다. 이게 다 돌잔치부터 호텔 뷔페서 치르는 등 어려서부터 경제 관념이 심각하게 왜곡돼온 결과예요."
그러나 전통적 가치를 숫제 대놓고 비웃는 21세기에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잘 먹혀 들 일이 아님을 잘 알기 때문에, 선생은 우보(牛步)의 길을 걸을 것임을 강조했다. 가건모가 사회의 모세혈관으로서 신선한 혈액을 공급한다는 소임을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다짐은 그래서
더욱 당연해 보인다. "존존하게, 퉁겨주고, 제의해 나갈 거예요." '목소리만 높은' 단체는 되지 않을 것이라는 각오를 선생은 이렇게 특유의 어투로 다짐한다. '잔잔하게, 정책을 감시하면서, 자기 목소리를 낼 것'이라는 뜻이다.
"특화된 전문성(specialty)만 남고 총체성(wholeness)은 죽은 우리 시대의 모순이 이런 위기를 자초한 겁니다. 너나없이 '저요, 저요' 내 말만 들어달라 소리치니 뭐가 제대로 되겠어요. 양보와 겸허를 가르쳐야해요. 욕심을 버려야 하구요.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는 걸 선진국들은 벌써 알고 실천하고 있잖아요. 비법은 없어요. 끊임없이 강의하고 설득해야지요."
육순을 훌쩍 넘겼지만, 선생의 영혼은 여전히 주변 사물에 민감하게 감응한다. 요즘 읽고 있는 책이 그를 몇 번이고 울렸다는 것이다. 'Beautiful Mind'란 두툼한 하드 커버 책이었다.
"우리는 어떻게든 (아이의 개성을) 눌러서 똑 같은 인간으로 만들어버려야 속이 시원하잖아요? 그 책에는 사람을 어떻게 형성해 내는가 하는 지가 감동 깊게 그려져 있었어요. 너는 참 중요하고, 네가 하는 생각은 온당하다는 사실을 항상 일깨워 주는."
교수 생활을 하면서 느껴 왔던, 교육부 장관 시절 경험했던, 억압적 교육 현실이 한꺼번에 복받쳐 올랐던 것이다. 영화로 보았을 때와는 또 다른, 그 때는 미처 못 느꼈던 사실들이 문자를 통해 새삼 우리나라의 현실과 중첩된 탓이었다.
"교육은 그런 거예요. 매만지고 다듬어서 사람 하나를 키워내는 것. 우리는 너무 융통성이 없어요. 틀에 넣고 찍어내려고만 하잖아요. 장관시절 입시제도를 가, 나, 다 군으로 분류한 것도 그 때문이었어요. 선택의 폭을 좀더 갖자는 것이었죠."
김대중 정부 교육개혁의 근간이 된 '5·31 교육개혁안'(95년)을 만든 주인공은 바로 김 장관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김 장관이 '국방대학원 강연 파동'으로 보름 뒤에 있을 교육개혁안 발표를 지켜보지 못한 채 물러났기 때문이다.
"그때는 대학총장도 아닌 영양학자 출신이, 결혼도 안 한 처녀가, 아이도 안 낳아본 여자가 무슨 교육을 알겠느냐는 식의 인신공격까지 난무 했었죠. 아, 그렇다면 가건모도 마찬가진가요?(웃음)"
결혼에 대한 집안의 강요도 없었지만, 텍사스 여대 영양학과에 들어가 3년 만에 석·박사를 따고 모교로 돌아온 것이 28살. 그 때부터 실험시설 하나 없던 학교에 장비 갖추기에서부터 연구 프로젝트 따내기까지 직접 뛰어다니며 동분서주했고, 밀려드는 대학원생을 맡으면서 "선 한 번 못 보고, 아니 볼 기회도 없어, 밀려밀려 살다보니" 독신이란다.
그러나 모시고 사는 어머니 홍승숙(94) 여사의 건강이 좋지 않아 요즘 병원에 다니고 있다는 말씀이며, 30년 넘게 단독주택에서 분재를 가꾸고, 참조기 한 두름 소금에 절여 소쿠리에 널어놓는 일상을 이야기할 땐 영락없는 딸의, 주부의 모습이 보인다.
"제가 지금 이화여고 동창회장 일도 맡고 있어요. 먹고, 마시고, 여행이나 하는 동창회가 아닌, 학교를 위해서, 후배를 위해서, 또 교사들을 위해서 뭔가 도움을 주는 동창회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동창회기금으로 교사들을 위한 '교재개발비'를 매년 1200만원씩 지원합니다."
교육부의 수장을 맡았던 영양학 박사답게 '학교 급식' 문제에도 관심이 많다. 이사장을 맡고 있는 한국식품영양재단을 통해 위탁급식 업체의 문제점들도 꼼꼼히 챙기고, 잉여 우유와 쌀, 섬유질과 올리고당 공급 등 우리 사회가 풍요 속에서 방치해 버린 문제점도 짚어 가고 있다.
"장관으로 일했던 2년여의 시간 동안 정부 정책이 어떤 맥락에서 작용하는지, 상아탑 밖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배울 수 있었어요. YWCA에 30년 간 몸담았던 경험으로 NGO 운영의 기본기도 마련됐고…. 무엇보다 평생 가정학에 몸담았던 지난 세월이 사회에 보탬이 된다니 몸은 좀
피곤해도 요즘 절로 신이 납니다."
이런저런 자리에 앉아봤다고 거기에 자족하거나 자만하지 않고, 늘 책임을 다해 "저이는 여전히 '건강한' 모습으로 일하는구나"라는 모범을 보이고 싶다는, 김숙희 가정을 '건강하게' 하는 시민의 모임 회장. 선생은 그렇게, 또 다른 30년의 새 아침을, 막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