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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태어나는가? 만들어지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사이언스북스


"명료하고 깊이가 있으며 교양적이다."(워싱턴 포스트), "박학다식하며 논의에 빈틈이 없다. 읽는 재미도 있다."(타임)

호들갑스럽기까지 한 미국 쪽 서평들이 책을 훑어보면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지난해 퓰리처상 논픽션 최종 후보에까지 올랐다니 그럴 법도 하다. 목침으로 쓸 만큼의 900쪽이 넘는 두께지만, 쉽게 읽히는 미덕 또한 갖추었다. '빈 서판'이 전하는 "잔인한 생물학적 진실"(402쪽)의 세계를 살펴본다.

"제 밥그릇은 제가 타고난다?" 자녀 교육을 위해 '기러기'도 마다 않는 요즘의 부모들에게 '밥그릇은 타고난다'는 말이 귀에 들어올 리 만무하다. 하지만 또 한 편으로 부모 맘대로 안 되는 게 자식 교육 아닌가. 아무리 좋은 환경을 조성해 줘도 계획대로 쉽사리 자라주지 않는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방과 후 학원 서너 군데는 돌아 집으로 오는 아이들을 생각해 볼 때, 분명 우리는 본성(nature)보다는 양육(nurture) 쪽에 더 큰 방점을 찍고 사는 사람들이다. 타고난, 선천적 본성을 믿는다는 것은 남녀차별 인종차별 등 온갖 불평등을 정당화해 주는 근거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통념이 과학적으로도 설득력을 지닐까. 언어학 분야의 석학이자 진화심리학자인 저자, 스티븐 핑커 하버드대 교수는 17세기의 철학자 존 로크 이후 오늘날까지 맹위를 떨치고 있는 인간 본성에 관한 이른바 '백지' 이론을 본격적으로 비판한다.

그는 인지신경학, 행동유전학, 진화심리학이 밝혀낸 놀라운 반대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많은 지식인들이 '빈 서판'(blank slate·마음은 타고난 특성이 없다), '고상한 야만인'(인간은 선하게 태어나지만 사회 속에서 타락한다), '기계 속의 유령'(우리 각자는 생물학적 제약 없이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영혼을 지니고 있다)이라는 세 가지 독단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고 진단한다. 지난 수백 년 간 '고상 떨어온' 종교와 철학의 목소리들은 지방방송에 불과하다는 것이 핑커의 주장이다.

그는 마음이란 '진화과정에서 형성된 일종의 복잡계' 혹은 '컴퓨터 뇌의 정보처리 과정'이라고 본다. 이 것이 과학적 진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아이들은 선천적으로 현명하므로 아이들의 깨끗한 마음 밭에 무얼 심을 지를 고민해야 한다"는 서머힐식 교육이념도 알고 보면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인지과학에 따르면 사람의 마음은 '텅 빈 공간'으로 볼 수 없다(책 제목은 '깨끗한 칠판'을 뜻하는 라틴어 tabula rasa를 옮긴 것이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특정한 학습도구 상자를 갖춘 채 태어나며, 이러한 생물학적 특징을 부모나 교사가 진흙 반죽하듯 버무릴 수 있다는 생각은 비과학적이며 부자연스럽다는 것이다.

짐작할 수 있듯 이 책은 유전자 결정론 쪽에 서 있다. 하지만 유전적 요인보다 환경과 교육을 비롯한 후천적 요인을 중시해 인종차별과 성차별, 계급적 편견을 무용지물로 만든 것 등 '빈 서판' 이론의 장점을 무시하지는 않는다. 저자가 수백 년 간 지성들이 이룩한 진보적 세계관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유전과 환경,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의 융화 또는 균형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래 물음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뒤바뀔 수 있다거나, 지능의 모든 차이가 환경에서 비롯된다거나, 부모가 자식의 성격을 시시콜콜 조종할 수 있다는 걸 믿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지 의심스러울 뿐이다. 인간의 본성을 인정하는 것은 개인적 세계관을 전복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나에게는 그 자리에 추천할만한 다른 것이 없다. 그것은 우리의 지식 세계가 이중의 생활을 접고 다시 과학과 결합하는 것, 과학의 도움을 받아 상식과 재결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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