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문화탐방단 학생들이 탐방 장소로 남한산성을 선정한 뒤 환호하고 있다.
“과거를 잊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영국의 역사학자 토인비는 말했다.
여행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숭고한 행위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더구나 한창 배우는 학생들에게 있어 여행이란 영혼을 살찌우는 너무나도 숭고한 행위임에는 틀림이 없다.
11월 들어 첫 번째로 맞이하는 토요일, 필자는 고등학교 1학년 학생 26명을 인솔하고 역사의 현장인 남한산성(경기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산 23)에 다녀왔다. 서산시에서 지원하는 역사문화탐방의 일환이었다. 여행에 대한 기대감으로 얼굴과 온몸에 울긋불긋 단풍이 든 아이들은 일찌감치 학교에 도착해선 필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 지각이 잦던 태훈이는 제일 먼저 도착해 어머니가 싸주신 김밥을 먹고 있었다.
▲ 남한산성 주차장이다.
학교를 출발한 버스는 오전 11시 남한산성 1번 주차장에 도착했다. 이곳이 바로 얼마 전에 개봉된 영화, ‘남한산성’에 등장하는 그 남한산성이다. 치욕의 병자호란, 인조에 얽힌 비극이 곳곳에 서린 곳. 역사는 끝임 없이 흘러 결국 이렇게 오늘에 이르고야 말았다. 제자들도 문화해설사의 살아있는 역사 이야기에 감동한 듯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이다.
▲ 남한산성의 전돌(塼乭) 성곽. 조선군은 영하 15도의 강추위를 방한복 대신 가마니 하나로 버텼다. 추위는 뼈를 타고 들어와 골수를 얼렸다. 무서운 건 청병이 아니라 바로 추위였다.
“이곳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청나라 30 대군을 피해 47일 간 대항하다가 항복한 곳입니다. 한겨울에 임금은 산성의 서문인 우익문을 나와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 앞에서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즉 한 번 절할 때마다 머리를 세 번 땅에 찧는 것을 세 번 하는 항복 의식을 치렀죠. 역사적으로 가장 무능한 왕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 인조입니다. 우리의 아픈 역사가 서린 곳이자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이곳 남한산성에서 당시 민초들의 심정을 느껴봅시다.”
당시의 처절한 비극을 알기라도 하는지 산성 주변의 낙엽은 늦가을의 따사로운 햇살아래 노랗고 붉은 기운을 뭉글뭉글 뿜으며 마치 눈물이라도 흘리듯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아, 지도층의 무능으로 저 낙엽처럼 붉은 피를 뿜으며 원통하게 스러져갔던 산성의 백성들이여, 부디 영면하소서. 필자는 이파리들의 조문을 뒤로 한 채 다음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래 묵어 연륜이 느껴지는 소나무며 잣나무들이 빽빽하게 열을 지어 서 있는 수어장대 을 지나 기왓장 하나하나마다 역사의 숨결이 느껴지는 우익문 에 도착했다. 당시 백성들은 지붕의 기와를 벗겨 적병에게 던졌다. 먹지 못해 가늘어진 손목으로 던지는 기왓장이 얼마나 위력이 있었으랴. 성안의 백성들은 청군의 날카로운 칼에 무단이 베어지듯 그렇게 죽어갔다. 그들의 원통함이 침엽수로 살아나 우리를 맞이하고 있다.
▲ 남한산성의 노송. 천년의 세월을 견딘 노송답게 그 자태가 늠름하다. 저 노송은 1637년 1월 30일.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 황제 홍타이지에게 무릎을 꿇던 비극적 장면을 지켜보았을까?
하늘이 무너졌다며 통곡하는 백성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렇듯 역사는 준엄하다. 먹고 마시고 자는 것이 유일한 행복이었던 백성들의 그 소박한 꿈조차 지켜주지 못했던 무능한 왕과 신하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필자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병자호란 당시 조선인구가 850만 명이었는데 그중 포로로 끌려간 백성만 50만 명이라고 하니 그 폐해는 실로 짐작이 가도고 남는다.
▲ 남한산성의 수어장대(守禦將臺). 수어장대란 요새 방어를 맡은 수어사가 지휘, 명령하는 높은 곳이란 뜻이다. 수어장대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1호이다.
▲ 남한산성 수어장대 부근의 암문. 남한산성에는 이런 암문이 여섯 개가 있다. 주로 야간에 몰래 성을 빠져나가 소식을 전하는 문이다. 영화에서는 고수가 이 문을 빠져나가 근왕병에게 성안의 긴박함을 알렸다.
탐방을 마치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태림이는 이런 말을 했다.
“최근 역사에 관심을 갖게 돼 참여했는데, 혼자 왔으면 특별한 의미를 발견하기 힘들었을 텐데 이렇게 선생님과 함께 와서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니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느껴져 감동적이네요. 과거와 현재의 삶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도 느꼈고, 대한민국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하게 됐습니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그러자 옆자리에 앉았던 또 한 녀석은 “역사에 대한 객관적 사실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얽힌 스토리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답사를 통해 알게 된 흥미로운 사실들은 앞으로 제가 역사 공부를 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라고 만면에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 전승문(북문)이다. 조선군 300이 청군을 기습하기 위해 이 문을 나섰다가 적의 계략에 빠져 전멸 당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문의 이름은 전승문(戰勝門)이다. 그날의 치욕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후대에 붙여진 이름이다.
▲ 임금만이 드나들 수 있다는 남문 즉 지화문(至和門)이다. 남한산성에는 제일 큰 문이다. 만민이 평등한 오늘날엔 무수히 많은 이들이 드나들고 있다. 인조가 알면 경천동지할 일이다.
오후 4시. 우리 일행은 다시 귀로에 올랐다. 길이 막히는 주말이라 서둘러야했다. 바야흐로 남한산성의 가을과 작별할 시간이다. 산의 능선을 따라 꼼꼼하게 쌓아올린 산성의 계단을 한걸음씩 밟으며 필자는 속으로 빌었다. 청나라 군사를 막으려 엄동설한에 불침번을 섰던 조선의 병사들이여, 이제는 그 엄혹한 추위를 모두 잊으시고 저 가을햇살처럼 따뜻한 이불을 덥고 대한민국의 품안에서 고이 영면하소서. 필자는 지존인 임금보다 백성에게 먼저 빌고 또 빌었다.
▲ 남한산성의 수어장대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전경이다. 탁 트인 시야가 한눈에 들어와 호연지기를 느끼게 한다. 북한산과 올림픽대교, 남산, 제2롯데월드까지 한눈에 보인다. 아,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다는 야은 길재 선생의 시 한 구절이 저절로 떠오른다.
▲ 남한산성의 빛과 바람이다. 인간보다 천년을 더 산 그들이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만은.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 척화파 김상헌이 청나라에 끌려가면서 읊었던 시조이다. 여기서 삼각산은 수도 서울을 둘러싼 북한산을 이름이다.
▲ 남한산성 답사단 일행. 해마다 연 인원 500만 명 정도가 찾고 있다. 주말이라 그런지 수많은 사람들이 남한산성을 찾았다. 필자는 관광객들을 바라보며 역사라는 것은 멀리 보면 거창한 것 같지만 실은 시민으로서 각자의 일상을 열심히 살아내는 것이 바로 역사란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도 역사에 많은 관심을 갖고 그 안에서 긍정적인 가치를 발견하면서 미래를 그려나가야겠다고 결심했다.
▲ 남한산성이 2014년 6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을 기념하여 세운 표석이다.
▲ 무망루(無忘樓). 병자호란의 치욕과 소현세자가 8년 간 청나라 심양에서 인질 생활을 하다 돌아온 것을 절대로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지었다고 한다.
▲ 숭렬전(崇烈殿)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과 산성 축성 당시 책임자였던 이서 장군의 영혼을 모신 사당이다. 병자호란 당시 온조왕이 인조의 꿈에 나타나 청병의 기습을 알려줬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사당을 세우자 온조왕이 다음날 다시 꿈에 나타나 혼자는 외로우니 충직한 신하 한 명을 보내달라고 했는데, 다음날 이서 장군이 병사했다. 인조가 생각하기에 이는 필시 온조왕이 이서를 데려갔다고 여겨 함께 사당에 모시게 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2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