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나는 꽃봉오리를 따러 산기슭 매화나무를 찾아 갔다. 볕살이 따뜻하게 내리쬔다고 느낄 즈음이면 ‘매화’라는 말은 내 곁에서 꽃으로 피어난다. “통도사 홍매가 피었겠지.”라고 혼잣말을 하고 “산청으로 매화 보러 갈까요?”라고 슬며시 옆 사람에게 말을 건네기 시작하면 ‘매화병’은 만개한다.
봄은 매화차를 마셔야 실체가 드러나게 된다. “뜨거운 찻물 속에 벙글어지는 하얀 꽃잎을 눈으로 감상하고, 깨끗하고 달큰한 향내는 코로, 입으로는 잘 어우러진 봄을 마신다. 찻잔의 온기가 손으로 느껴지고 찻잔에 떨어지는 그윽한 소리가 귀를 즐겁게 한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공부하던 저자는 들뢰즈, 푸코를 비롯한 많은 철학자를 만나면서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를 느꼈으며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사유를 표현하고 싶다고 하였다. 자신의 언어를 가지는 것, 그 과정에서 함께 공부할 벗을 가지는 것을 중요하다고 하였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작가 프로스트는 ‘걸작은 일종의 외국어로 쓰여 진다’고 했다. 모국어의 경계를 뚜렷하게 만들고, 그럼으로써 다른 언어의 ‘침입’으로부터 모국어를 ‘보호’하는 것은 하나의 규칙과 의미에 갇히기를 욕망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머물러야 하는 곳은 항상 경계 위다. 김삿갓이 했던 것처럼 하나의 언어에 머무르지 않고, 이것과 저것의 경계 위에서 이것과 저것 모두를 구부리고 변화하기. 그럼으로써 모국어를 오염시키고 그 경계를 흐리기, 언어 안에서 언어를 깨고 구부림으로써 자신의 언어 안에서 낯설게 하기. p.115
저자는 국어를 오염시키라고 말한다. 허억~~~~ 국어 오염이라는 말은 순수한 국어문법, 순수한 우리말, 올바른 우리말 표현 등에 지나치게 집착한다는 것을 꼬집고 있다. 즉 아이들의 철자법을 무시한 말에서 ‘진정성’을 보기도 하고 이민 세대나 한국으로 귀화한 외국인의 어색한 한국어에서도 우리말의 특이성이 발견된다. 중요한 것은 국어가 아니라 어떤 사유를 보여주는 언어인가, 열린 언어인가라는 점이며 국어의 순수성에 집착하지 말라고 한다.
허균이나 김만중은 그 당시를 대표적인 지식인이고 한문에 능통하였지만 그들이 오랜 세월동안 자신을 길들여온 지배적인 언어를 버리고 ‘언문’이라는 경멸해 마지 않았던 문자를 가지고 새로운 표현을 모색하였다. 거꾸로 한 세기 뒤 다산 정약용과 연암 박지원은 한글로 글을 쓰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들의 언어가 고답적인 것이 아니다. 정약용의 한시는 민중의 삶을 구체적으로 포착하였고 연암의 산문은 전혀 새로운 문체를 보여준다. 이들의 한문은 한글로 쓰여진 어떤 글보다 혁신적이다. 결국 ‘한글’이냐 ‘한문이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말을 풍부하게 하는 것은 우리말을 다른 말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사용하는가 하는 것이다. 한 언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여러 언어를 넘나들면서 그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오염물을 제거하고 순수 우리말을 회복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외부에서 들어온 말이 나의 언어를 풍부하고 기름지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언어 즉 말과 글은 그 사람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언어는 세상과 나를 이어주는 다리이다. 읽기라는 접속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쓰기를 통해 읽기의 완성을 보여준다. 한 편의 글이 되기까지 많은 언어들이 들어오고 나가고 또 다른 세상과 접속한다.
매화차를 마셔야 봄을 맞을 수 있다는 것은 나의 생각이다. 이 생각은 나의 언어로 말해지고 그러면 몸은 매화가 핀 밭으로 움직이고 그 작은 꽃봉오리는 찻잔에서 피어나 말을 건넨다. 매화는 나의 봄 언어다.
『언어의 달인, 호모 로퀜스』, 윤세진지음, 그린비,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