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어느 사회학자가 지난 50여 년간의 현대사를 연구하여 시대적 변천사를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1950년대는 허무의 시대였다. 2차 세계대전 속에 숱한 죽음을 보며 사람들은 삶에 대한 깊은 허무에 빠졌다. 1960년대는 쾌락의 시대였다. 무수한 죽음을 보며 허무에 빠졌던 사람들은 우선 즐기고 보자며 쾌락을 탐닉하게 되었다. 1970년대는 방황의 시대였다. 쾌락이 궁극적인 삶의 의미를 가져다줄 수 없다는 걸 깨닫자 사람들은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1980년대는 이기주의의 시대였다. 급속한 경제개발을 이루면서 유대감이 결여된 사회구조 속에서 자신의 이익을 가장 우선시하는 철저한 이기심의 지배를 받는 나밖에 모르는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1990년대는 가치혼돈의 시대였다. 그 당시 사람들은 부를 이루는 것이 생의 최대목적이었다. 돈이 삶의 절대가치로 등극하자 인간의 본질을 잃어버린 가치관 혼돈의 시대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2000년 이후를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어쩌면 상실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요즘 사람들을 만나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사는 게 너무 재미없다. 우울하고 답답하다”는 말이다. 사는 게 활력도 없고 재미도 없단다. 그저 살아 있으니 사는 거란다. 그래서인지 거리를 나가보면 행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무표정이다. 웃음이 없다. 그리고 어지간한 일에는 감동하지도 않고 기뻐하지도 않는다. 지극히 냉소적이다. 도대체 왜 그럴까?
원인을 규명해보자. 첫째, 열망의 상실이다. 자신의 생애를 걸만한 일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현대인들의 최대 비극이다. 어릴 적 꿈꾸었던 소망, 하고 싶었던 일에 대한 갈망을 눌러 죽이고 소득위주와 안정적인 직업을 선택한다. 그리고 성취감이나 희열도 없이 해가 뜨고 질 때까지 활동해야 할 대부분의 시간을 오직 먹고 살기 위해 소진시킨다.
둘째, 존재 본질의 상실이다. 삶은 뚜렷한 두 가지의 형태를 보인다. 하나는 소유를 축적하는 삶이고, 또 하나는 존재가치를 추구하는 삶이다. 소유의 만족도는 반드시 비교 대상이 존재한다. 그래서 비교 대상보다 우위를 점했을 때 만족감을 느낀다. 하지만 죽음이라는 완벽한 단절은 그 모든 소유를 제로로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그 끝자락에서 헛살았다고 통곡한다. 반면에 존재가치란 나로 인해 누군가가 기뻐하고 누군가 행복해지는 이타적 선상에만 존재한다.
셋째, 이웃에 대한 신뢰의 상실이다. 지금 우리들은 인류역사상 가장 번성하고 있으며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을 할 수 있고, 가고 싶어 하는 곳을 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고독하다고 말한다. 이는 타인에 대한 믿음의 상실 결과이다.
그렇다면 정녕 현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첫째, 세상에 대한 도전이다. 어쩔 수 없이 자신의 갈망과는 다른 직업을 선택했다면 자꾸만 벗어나려 할 것이 아니라 거기서 최선을 다하여 의미와 가치를 창조해야 한다.
둘째, 자아를 찾아 행동하는 삶이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무엇을 할 때 기쁘고 행복한지를 알아야 한다. 인생길에서 일평생 분투해야 할 일을 찾으면 그 길에서 생의 진정한 만족을 얻을 수 있다.
셋째, 공동체의 완전한 일원이 되어야 한다. 사람은 혼자서는 그 어떤 의미도 없으며, 결코 행복할 수 없는 존재이다. 행복은 ‘너와 나’, ‘나와 타인’ 사이에서의 교감으로 파생된다. 그러므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배려하며 서로 간의 신뢰를 통해 좋은 관계를 맺어 나갈 때 그 안에서 인간으로서의 최고 완전성을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완전히 사랑할 수는 있다.
이처럼 우리는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지혜를 누구나 체득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엔 어떤 원리나 주의보다 행동이 필요하다. 백만 가지 약도 복용하지 않으면 효과가 없다.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다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이것이 교육의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