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훌륭한 선조들 덕분에 1주일이면 뗄 수 있는 한글을 문자로 사용하고 있다. 이 한글이 정보화 시대를 맞아 세계로 널리 퍼져나가니 자긍심도 느낀다. 한자를 주로 사용하는 중국, 일본1학년생은 3학년 책도 접근하기가 어렵다. 필자는 실제로 일본에서 대학생이 저자의 이름을 몰라 망설이니 교수가 읽어주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였다. 우리는 한글 덕분에 학교에서 1학년만 마치면 뜻은 완전히 몰라도 6학년 책도 읽어낼 수 있다. 인터넷에서 검색하거나 사전을 찾아보면 가능한 시대다. 그만큼 우리는 어려서부터 많은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문해력은 정보를 제대로 잘 인식하도록 언어가 역할을 하여야 한다. 한글을 읽을 수는 있다고 해도뜻을 제대로 이해하는 문해력에는 문제가 숨어 있다. 한글은 표음문자이고 한자는 표의문자이다. 한글은 음을 잘 알게 하고, 한자는 뜻을 잘 알게 한다. 한글은 배우기 쉬운 문자이고 한국어는 외국인이 배우기 어려운 언어이다. 한글은 읽기를 잘 하게 하고, 한자는 생각을 깊이 하게 하는 특징이 있다. 어느날 선생님에게 제자들이 "뱀을 왜 파충류라고 해요?" 따져 물으면 쉽게 답을 하지 못하게 된다. 제헌절에 "태극기
▲ 우리말 속뜻 논어 최근 우리 사회에 '교육에 관한 질문'이 크게 부각되고 있는 현실이다.학교 현장의 질서 붕괴는 물론 의정 갈등이 길어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한국사회의 미래에 대한 불안을 느끼고 있는 현실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둘 다 매우 중요한 교육의 현장의 문제다. 정부의 위기 관리 능력 부족과 각 주체들의 이기적인 생각이 충돌,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상대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점이다. 우리는 한국 사회가 민주화 되고 질서가 존중되며 인간이 존중 받는 사회로 가야 한다고믿고 사는데 현실과 괴리가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이를 보면서 민주적 사회에서민도에 따라 극한 대립, 혼란스러운 분쟁, 폭력적 갈등이 지속하는 일이 발생한다는 것이 이돈희(전 교육부 장관)박사의 분석이다. 우리나라도 이러한 문제에 있어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책으로 이돈희 전 장관은 '생활 민주주의' 교육을 강조했다. 생활 속에서 민주주의의 개념과 과제들을 실천하면서 해결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전·현직 교육자 모두 힘을 합쳐 민주주의를 더욱 공부하고 가르치고 본을 보이는 생활을 꾸준히 해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학교공동체’, 이는 자녀를 학교에 보내는 학부모라면 누구보다 더 자주 듣는 말이다. 하지만 이처럼 너무 익숙하기에 별 감응 없이 다가서는 말도 드물 것이다. 따라서 어떤 말이든 그것이 의도하는 바가 화자와 청자 상호 간에 울림이 없다면 이는 허울 좋은 형식주의 내지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증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를 두고 일종의 과유불급이라 하던가? ‘공동체’는 개인의 삶을 품격 있게 만들 수 있는 ‘만남의 장’이자 ‘공감의 장’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공동체는 결속을 약화시키는 어떤 행태나 이질적인 정서를 거부한다. 결국 집단의 객관화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중구난방으로 주관적이고 부정적인 정서가 난무할 때는 공동체의 존재 의미가 없는지도 모른다. 이에는 즉각적인 결속을 다지는 조치가 필요하다. 왜냐면 그 후유증이 너무 심각하기 때문이다. 작금의 우리 학교공동체가 교사와 학생, 교사와 학부모 간의 갈등으로 치닫고 있는 것에 우려를 금치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학부모가 교사를 교육전문가로 존중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자녀 관련 사소한 교육활동에도, 이의를 제기하고 거부하며 심지어 악성 민원과 갑질이 팽배하며 교사를 온갖 불리하게 엮어
흔히들 쌍둥이일지라도 먼저 나고 늦게 남에 따라 세대차이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는 동갑내기에도 윗물, 아랫물과 같이 폭넓게 차이를 보이는 이유와 비교된다. 하물며 오랜 세대 차이를 보유하는 학교공동체는 말해서 무엇 하랴. 옛말에도 “팔십 먹은 노인도 세 살 어린애에게서 배운다”고 했다. 인생의 선후 관계에 따른 배움은 필연적이다. 하지만 배움을 태어남의 순서에 따른 위계질서로 당연시하거나 일방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경계할 일이다. 학교는 다른 사회의 조직과 달리 세대 차이가 널찍한 스펙트럼을 이루고 있다. 즉, 10대 전후에서부터 60대 초반까지의 연령층이 넓게 포진되어 있다. 그래서 각 세대 간의 의식에 큰 차이가 존재하며 이 차이로 인한 갈등이 표면화 되면 공동체 간에 조용한 날이 드물게 된다. 문제는 교사는 기성세대 성인이기 때문에 미성년인 학생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는 주체라는 관념에서 탈피하는 것이다. 배움은 세대의 순서를 역행해 발생하는 일이 많다. 학교에서는 환갑지난 교사가 10대의 청소년에게서 배우고 또 배워야 하는 일이 다반사다. 실제로 학교에 따라서 차이는 있으나 교사가 학생에게서 배웠다는 각종 사례와 교훈은 얼마든지 있다. 자연발생
프랑스의 작가인 폴 부르제(Paul Bourget, 1852~1935)는 그의 소설 『정오의 악마』에서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사고의 한계가 결국 자신이 구축해놓은(실상은 타력에 의해 구축된) 습성과 환경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는 평소에 자동적으로 습관화된 생각이 얼마나 중요한지의 관점에서 볼 때 『논어』에서 말하는 “안다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와 같은 맥락이라 할 수도 있다. 그만큼 체질화된 생각은 세상을 사는 훌륭한 지혜의 수단이자 활동의 원천으로 작용할 수 있다. 요즘 Z세대들의 초긍정적인 ‘원영적 사고’가 화두다. 이는 걸그룹 ‘아이브(IVE)’의 멤버인 장원영의 특별한 곳에서의 특별한 사고에서 명명된 사고방식이다. 사연인즉, 스페인의 어느 빵집에서 자신이 사려던 빵이 품절돼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 놓이자 불평하는 대신에 “앞 사람이 제가 사려던 빵을 다 사가서 너무 럭키(lucky)하게 제가 갓 나온 빵을 받게 됐지 뭐예요? 역시 행운의 여신은 나의 편이야”라고 말 한데서 출발했다. 이런 초긍
어둠이 칠흑 같던 일제 강점기, 고뇌하고 번민하며 수도자처럼 살아갔던 저항시인 이육사는 그의 시 광야(廣野)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까마득한 날에/하늘이 처음 열리고/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모든 산맥들이/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차마 이곳을 범하든 못 하였으리라/끊임없는 광음을/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주지하는 바와 같이 민족시인 이육사의 삶은 해방 바로 직전까지, 끊임없이 저항하고 실제 영어(囹圄)의 몸으로 모진 고문에 의한 극도의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민족을 위한 희망의 씨앗을 뿌렸다. 그의 유물 속에서 발견된 광야는 부끄럽지 않게 이 시대를 살아가려는 교사들에게도 의미하는 바가 매우 크다. 그것은 단지 비정상적인 교육에서 정상적인 교육을 향한 그리고 이상적인 교육만을 상상하고 기다리지 않고 지금 바로 할 수 있는 것부터 실천해보자는 결의를 다지게 만든다. 정철희는 『교사의 고통』에서 ‘리더는 흙을 가꾸는 사람’이
“나사 풀린 교육부가 교육개혁?” 이는 대한민국의 인터넷 교육언론으로서 최근 성장세와 더불어 교육계에서 주목받는 〈교육플러스〉가 내놓은 기자 ‘취재노트’(2024.5.26.)의 제목이다. 기사에 의하면 최근 야당과 교원단체들이 기자회견을 통해 3년간 약 1조5000억 원이 투입되는 정부의 디지털 기반 교육혁신 사업이 부실·졸속 논란에 휩싸인 가운데 이를 심도 있게 지적하고 있다. 이는 근래 4세대 지능형 나이스(NEIS)의 부실 구축 및 운영 등, 이미 수많은 질타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다시 교육부의 어처구니없고 한심한 국가정책의 관리와 운영에 따른 것이다. 내용인즉 '교실혁명 선도교사' 연수의 시작과 함께 들려오는 전국의 참가 교사 1만여 명의 이름, 소속학교, 휴대폰 번호 등 개인정보가 담긴 파일이 유출된 사건과 함께, 허술하고 방만하게 드러난 준비 부족 상태에서 연수를 강행한다는 비판에 휩싸여 있다. 이는 교육개혁의 주무부서인 교육부가 제 정신과 자세로는 도저히 발생할 수 없는 사건⋅사고이며 스스로 제 발등을 찍어 야당과 교원단체에 공격의 빌미를 주었기 때문이다. 단지 교육부 담당 부서장이 사과하고 끝날 일이 아닐 정도로 교육개혁의 실행에 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