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과 근심은 나를 살게 하고, 안락함은 나를 죽음으로 이끈다.” 이는 『맹자』 ‘고자(告子) 하(下)’편에 나오는 “생어우환 이사어안락야(生於憂患 而死於安樂也)”라는 말이다. 즉 걱정과 근심 등의 위기가 오히려 우리를 살린다는 말이다. 실제로 우리는 위기를 만나면 온갖 지혜를 짜내고 극복하려고 노력한다. 이를 통해 더 지혜로워지고 문제를 해결하며 한층 성장하게 된다. 이에 반해 안락 속에서는 노력하지 않아도 되기에 게을러지고 나태해진다. 이와 유사한 또 다른 고전 『한비자』 ‘해로(解老)’편에는 “겨울에 얼음이 단단하게 얼지 않으면 봄여름에 초목이 무성하지 않다(동일지폐동야불고, 즉춘하지장초목야불무:冬日之閉凍也不固, 則春夏之長草木也不茂)”라고 했다. 철학자 니체는 “자신을 죽이지 않는 모든 것은 자신을 강하게 한다”고 했다. 이 말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모두가 역경을 뚫고 나서야 비로소 힘 있게 자라고 무성해진다는 것으로 역경 극복은 삶의 원동력이자 존재의 의미임을 알 수 있다.
역경지수(AQ:Adversity Quotient)는 미국의 커뮤니케이션 이론가 폴 스톨츠(Paul Stoltz)가 1997년에 제기한 이론으로 인간능력을 헤아리는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그는 등산을 하면서 난관에 부딪쳤을 때 3가지 유형의 사람을 제시했다. 첫째, 포기하고 내려오는 사람. 둘째, 적당한 곳에 캠프를 치고 안주하는 사람. 셋째, 위기를 극복하면서 앞으로 나가는 사람이다. 그러면서 역경을 뚫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은 자신뿐 아니라 조직까지 위기에서 구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오랫동안 아이들을 평가하던 지능지수(IQ)와 감성지수(EQ)의 뒤를 잇고 있다.
오늘날은 변화가 일상적이다. 그래서 변화를 감지하는 능력만큼이나 변화가 수반하는 위기를 극복하는 지혜와 능력이 중요해졌다. 역경극복능력은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지는 것처럼 사람을 굳세게 만들어준다. 하지만 요즘은 많은 부모들이 아이가 할 일을 최소화 하거나 부모가 나서서 대신해 주기도 하고 아이가 겪을 어려움을 미리 제거해주기도 한다. 그래서 자녀는 이미 완성된 꽃길만 걸으면 된다.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위기와 어려움은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데 과잉보호 속에서 자란 아이가 그것을 헤쳐나갈 수 있을까? 이미 온실 속의 화초가 된 아이는 부모나 교사가 물고기를 잡아 완전 요리로 식탁에 올려주기에 물고기 잡는 법을 모르고 성장한다. 그래서 오랜 세월을 공부하고도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역량이 길러지지 않은 채 사회에 배출된다. 이런 젊은이들은 경쟁력을 상실하고 또 다시 오랜 시간의 업무적응 훈련을 받게 된다. 현실과 유리된 교육은 이렇게 시간, 노력, 경비를 낭비한 채 겉돌고 있다.
또 다른 현상을 보자. 오늘날 우리 청소년들은 꿈을 꾸지 않으려 한다. 즉 꿈꾸기를 두려워한다. 왜냐면 실생활의 문제에 부딪쳐 실패하는 것이 두렵고 스스로 할 수 있는 역량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인에 기생하여 살아간다. 집집마다 부모에 기대여 살아가는 이른바 ‘기생충’, ‘은둔형 외톨이’라 불리는 젊은이들을 보라. 학교에서는 조금만 힘들어도 적응하지 못하고 학교를 떠나는 청소년이 늘면서 매년 6만 명 넘게 학교 밖 청소년을 배출하고 있다. 이들에 대한 사회와 국가의 관심은 날로 증대하여 사회문제화 되고 있다. 이제는 그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국가적, 사회적, 지역적, 학교와 가정 차원에서의 지혜를 모아야 할 때이다.
우리 사회는 이제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은 전설이 되어 가고 있다. 고진감래형 인간육성은 교과서의 학설로 바뀌어 간다. 그 대신 사람들은 하루하루 소소한 행복을 추구하고자 소확행에 목숨을 거는 세상이 되었다. 물론 현재를 담보로 단지 미래를 추구하는 것은 문제가 많다.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하지만 역경을 견뎌내고 버티는 힘은 어떻게 기를 것인가? 역경극복능력의 함양을 위해 우리 교육은 무엇을 해야 할지 숙고할 때이다. “가시 돋은 장미는 더 아름답다”한 말이 청소년들에게 현실에선 얼마나 울림으로 다가올까?
그렇다면 학교에선 어떻게 역경극복의 교육을 실시해야 할까? 첫째. 청소년에게 꿈을 갖게 하자. 꿈을 먹고 자라는 것이 청소년의 특징이 아니던가? 그런데 우리 사회는 날로 꿈이 없는 청소년이 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만큼 학교 교육은 현실과 유리된 채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 1906-1989) 는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6명의 사람을 등장시켜 기다리지만 결국 그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고도만이 남았다. 현실에서 고도는 이상향, 파랑새, 행복, 꿈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가까이에 있을 수도 있고 멀리 떨어져 있을 수도 있다. 그래도 그 기다림의 순간엔 희망이 존재한다. 꿈이 없으면 희망이 없는 미래다. 둘째, 꿈을 이루도록 청소년과 대화하고 연대하자. 실패 속에서 회복탄력성이 길러진다. 그들을 격려하며 그들을 믿고 기다려주고 그들과 연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저녁이 있는 삶‘이 필요하다. 가정의 밥상머리 교육을 다시금 부활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나아가 가정과 학교와 지역사회의 연대로 확산할 필요가 있다. 셋째, 청소년의 선택을 존중하자. 교육은 기다리고 함께 하는 것이다. 미완성의 인격체에게 너무 성급하게 결과를 요구하지 말자. 강요와 억압으로 일관된 교육은 진정한 배움이 일지 않는다. 청소년이 무언가 하고자 하는 의지, 즉 그들이 결단한 선택을 존중하고 비록 서툰 행동과 결과일지라도 힘들게 시도한 흔적이 묻어나고 어제보다 조금이라도 나아질 오늘이면 그것으로 만족하자. 인간은 다양한 유형이 존재한다. 대기만성(大器晩成)형도 그 중의 하나다. 어려서 천재라고 간주하던 아이들이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리고 스스로 선택한 것에는 책임지게 하자. 그것이 성숙하고 행복한 어른으로 성장하는 진정한 교육이다. 넷째,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정신을 고양하자. 행복은 혼자서는 이룰 수도 없고 가능하지도 않다. 자기만을 위해 사는 나르시스트는 삶의 의미가 없다. 삶의 의미는 타인과 함께 하고 누군가를 돕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지금 당장 행복해 지고 싶으면 남을 도우라‘고 했다. 이타적 삶 속에 진정한 행복이 존재한다. ’이웃과 공동체에 도움이 되는 이타적 존재‘가 진정한 교육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동⋅서양의 전통 있는 교육기관은 그렇게 인간을 교육한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사회, 국가를 행복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코로나19는 새로운 패러다임, 뉴노멀(New Normal)의 혁신적 사고를 요구한다. 그런 측면에선 위기가 곧 기회다. 현실의 역경을 극복하는 삶 속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잉태한다. 우리 청소년이 바로 그렇다. 그들에게 사랑으로 다가가 삶의 에너지를 충전시키는 사랑의 배터리가 되자. 오늘도 그들은 하루하루를 힘들어 한다. 지친 모습에서, 억압된 삶 속에서, 하나의 길 만이 제시된 현실에선 그들의 미래는 암울하다. 그들은 우리의 관심과 사랑 속에서 성장한다. 청소년의 역경지수의 함양은 곧 공동체 정신을 고양하는 것이다. 공동체 정신은 더불어 사는 지혜를 길러주는 것이고 이는 전 지구촌의 인류에게 희망을 고취하는 것이다. 그것은 역경극복능력에서 나온다. 지금처럼 모두가 힘든 일상에서 미래의 주인공인 청소년에게 마음이 기우는 것은 그래도 교육의 강력한 힘을 믿기 때문이다. 교육은 살아 있고 그 속엔 언제나 희망의 싹이 움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