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어떤 자리에서 내 생각을 진지하게 말했을 때, 누군가 “그건 당신 생각이고….”라고 타박을 한다. 얼굴 맞댄 자리에서 내 의견이 종이 구겨지듯 무시된다. 무안하고 민망하다. 어쩌겠는가. 상대는 나의 관점에 동의할 수 없다는데. 그러고 보니 나도 한때는 ‘그건 네 생각이고…’라는 말을 심심찮게 했던 것 같다. 박정해 보이기는 해도 이 말에 묘한 매력이 있나 보다. 친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 말이 관용어처럼 쓰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런데 무안함과 민망함을 냉정하게 걷어내고 보면, 나의 관점을 말할 때 무언가 모자람이 없었는지 생각해 볼 여지가 보인다. 그러니까 말을 꺼낸 내 쪽에서도 나 자신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내가 어떤 방식으로 말을 했기에, 어떤 빌미를 주었기에, 그건 당신 생각이고 어쩌고 하는 말을 듣게 된다는 말인가. 물론 나와는 관점 자체를 달리하는 상대 논객의 충동적인 반응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걸로도 잘 해명이 안 되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혹시 내가 너무 지나칠 정도로 진지하게 말하지는 않았나 생각해 볼 일이다. 상대가 따라와 주지 않는, 나만의 과도한 진지함은 자기 과신과 오만으로 비칠 수도 있고, 만약 오만이라면, 그것은 편견일 가능성이 있다. 상대가 그렇게 본다는 것 이전에, 내 관점이란 게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영국의 소설가 제인 오스틴(Jane Austen 1775-1817)의 작품 ‘오만과 편견’을 읽어 보면, 오만과 편견이 동전의 앞뒤와 같은 것이며, 서로 동의어임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는 것이 있다. 자신의 관점을 피력할 때, 진지하면 진지할수록 일종의 착각을 동반할 수 있다. 내 관점은 선한 동기에서 나온 것이며, 선한 목적을 가졌으므로 옳다. 나는 이성적 존재이고, 그런 만큼 내 관점은 합리적 가치를 지녔다. 따라서 잘못이 있을 수 없다. 나는 진지함과 진정성을 가지고 내 관점을 피력하는 것이므로 내 관점은 순수하다. 그러므로 내 생각에는 문제점이 없다. 이런 식의 착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착각이란 주관성에서 도저히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상대의 관점에 대해서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건 당신 생각일 뿐이야!”라고 일갈하며, 매몰차게 배격하는 사람의 관점이란 또 무엇인가. 아니 그의 관점 이전에, 타인의 관점을 다루는 그의 태도는 온당한 것인가. 지나친 진정성으로 자기 확신을 절대시하는 사람 못지않게, 그 역시 주관적이다. 게다가 폭력적이다. 그래서 말을 꺼내는 쪽이나, 그걸 반박하는 쪽이나, 말머리를 이렇게 시작하라고 하지 않는가. “이건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이렇게 시작해서 개인적 견해의 울타리를 넘어, 널리 동의를 얻어나가면 그것이야말로 ‘힘 있는 관점’이라 할 수 있다. 한때 만화가 박광수 씨가 세태 풍자를 하는 네 컷짜리 만화를 소통시키면서 자기 만화의 간판을 ‘광수생각’이라고 달아두었지만, 그것이 광수 씨 생각만은 아닌, 울림 있는 생각으로 사람들에게 널리 공유되었던 장면이 생각난다.
어떤 관점이 심하게 주관적이면 다른 관점과 어울리기가 어렵다. 마찬가지로 상대의 주관성을 조금도 인정해 주지 않으려고 하면 그 또한 같은 수준의 주관성에 빠져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세상은 주관성과 주관성 간의 대화하기, 즉 상호 주관성(inter-subjectivity)에 의해서 인식을 확립해 나가는 데에 와 있다고 하지 않는가.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은 관점들도 모여 뒤섞이는 바다이다. 그 숱한 관점들이 서로 다르면서도 어울리고, 밀어내는 듯 당겨서, 비로소 ‘우리의 관점’을 만들어 낸다.
02
관점과 뉴스의 상관에 대한 흥미 있는 국제 비교 조사가 눈길을 끈다. <로이터 저널리즘 연구소>의 ‘디지털 뉴스 리포트 2020 보고서’는 40개 국가별로 뉴스를 어느 정도 신뢰하는가를 조사했다. 한국인이 뉴스를 신뢰하는 정도(뉴스를 믿는다고 응답한 비율)는 21%로 40개 나라 중 최하위였다. 40개국의 전체 평균 뉴스 신뢰도는 38%이었다. 주요 선진국 시민이 10명 있으면 6명꼴로 뉴스를 믿지 않는다고 하니, 도대체 뉴스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국가별 뉴스 신뢰도가 가장 높은 나라는 핀란드와 포르투갈로 56%이었다. 일본은 37%로 22위, 미국은 29%로 30위이었다. 정파적 이해에 따라 정쟁이 심하고 정치가 불신을 당하는 경우, 국민의 뉴스 신뢰도가 낮았다.
다음으로 국가별 뉴스에 대한 선호도 조사가 있었다. 각국의 국민에게 어떤 뉴스를 좋아하는지를 물었는데, 다음의 세 가지 항목을 주고 반응하도록 하였다. 1) 나와 같은 관점을 반영한 뉴스 2) 특정한 관점이 없는 뉴스 3) 나와 반대되는 관점을 반영한 뉴스 등이었다. 한국인의 뉴스 선호 반응은 다음과 같다.
1) 나와 같은 관점을 반영한 뉴스를 선호한다. 44%
2) 특정한 관점이 없는 뉴스를 선호한다. 52%
3) 나와 반대되는 관점을 반영한 뉴스를 선호한다. 4%
프랑스의 경우, 1) 20%, 2) 58%, 3) 22% 등으로 나타났고, 독일의 경우 1) 15%, 2) 80%, 3) 5% 등으로 나타났다. 프랑스는 나와 관점이 다른 뉴스를 선호하는 비율(22%)이 가장 높았고, 독일의 경우는 특정의 관점이 없는 객관적 뉴스를 선호하는 비율(80%)이 가장 높았다.
한국은 두 가지 점에서 두드러진다. 나와 같은 관점을 반영한 뉴스를 선호하는 비율(44%)이 가장 높은 나라이었고, 동시에 나와 반대되는 관점을 반영한 뉴스를 선호하는 비율(4%)이 가장 낮은 나라로 나타났다. 내가 믿고 싶은 뉴스만 골라서 취하려는 태도, 내 관점과 반대되는 뉴스는 외면하려는 태도가 가장 두드러진 나라로 드러났다. 참고로 40개국 평균은 1) 나와 같은 관점을 반영한 뉴스를 선호한다. 28%, 2) 특정한 관점이 없는 뉴스를 선호한다. 60%, 3) 나와 반대되는 관점을 반영한 뉴스를 선호한다. 12% 등으로 나타났다.
관점을 빙자한 뉴스, 즉 자기의 관점을 뉴스로 둔갑시킨, 그런 뉴스들이 횡행하는 풍토에서 국민의 뉴스 신뢰도가 높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이다. 뉴스 수용자도 자기 입맛에 맞는, 즉 자기의 관점에 맞는 뉴스만 믿겠다고 하는 풍조가 일반화되었다고나 할까. 내가 믿고 싶은 뉴스만 좋아하고, 내 관점과 반대되는 뉴스는 좋아하지 않으려는 풍토야말로 가짜뉴스가 자라는 음습한 토양이 아닐까. 믿을 수 없는 뉴스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는 생태(내가 믿고 싶지 않은 뉴스들이 가득한 생태)에서는 그로 인한 손해가 속출할 것이다. 공정의 파괴와 공익의 실종이 속출할 것이다. 이런 생태에서 개인과 시민사회는 언론 정보 역량과 태도를 어떻게 길러가야 할까. 뉴스에 대한 시민의 민주적 감수성이 높아지는 방향으로 시민사회도 진화할 것이다.
03
관점의 사전적 뜻은 이러하다. ‘사물을 관찰하거나 고찰할 때, 그(관찰하고 고찰하는) 사람이 보고 생각하는 태도나 방향’으로 풀이되어 있다. 그러니까 애초에 모든 관점은 다 각기의 입지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절대적 관점’은 없다. 관점에는 특정의 태도나 방향이 이미 들어 있기 때문이다. 개개의 관점은 불완전하다. 그러나 그 개개의 관점들이 모여서 선순환할 때, 불완전성은 사라진다. 그 관점의 융합들이 우리를 구성하고 사회를 재건한다. 어떤 관점을 구박하여 ‘그건 네 생각일 뿐’하고서 처박아 두는 사회는 근대를 넘어서지 못한 미숙한 사회다.
이렇듯 다양한 관점은 시민사회를 정신 가치 면에서 구성하는 질료이다. 관점들은 서로 만나고 부딪치면서, 서로 허용하고 밀어내면서, 흐름을 만든다. 지류를 형성한 관점들은 계속 다양하게 만나고 어우러져서, 여론의 강으로, 세계 인식의 바다로 흘러간다. 그 강과 바다는 개개 주관의 관점들이 ‘해석의 순환’을 통해 이루어 놓은 소통의 생태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러하므로 어떤 특정의 관점도 다른 관점을 조롱하고 비난하고 모욕하고 언어적 테러를 가할 수 있는 권한은 없다. 관점을 고수한답시고 무명(無明)에 갇혀 있을 수는 없다. 관점 유지하기의 어려움이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관점이 ‘앎의 전체성’을 가로막지는 않는지, 살펴볼 일이다. 교육에서 학생을 각성시키는 일 또한 그러하다. 관점의 얻음과 그 관점으로부터의 떠남을 돕는 일 아니겠는가.
상대의 관점에 대해 너그러워지면, 그것이 곧 내 관점을 키우는 힘이 된다. ‘앎의 전체성’을 내다 볼 수 있는 힘이 된다. 그러는 과정에서 관점의 유연함을 기르자. 이는 배우는 이의 지적 태도이기도 하지만, 삶에 대한 태도이기도 하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겸손함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