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이 되면 대형 전시관에는 기획전이 열린다. 이러한 기획전이 최근에는 더욱 많아지고 다양화되어지고 있다. 기획전을 열기 위해서는 보험료, 대여료, 운송료, 광고료, 대관료 등이 만만치가 않으나 계속 많아지는 것은 장사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전시장을 가면 작품을 감상한다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사람들에게 밀려서 주마간상(走馬看山)식의 감상을 한 예가 많다. 이러한 기획전은 대부분 방학에 맞추어 열리고 있다. 그것은 관람자를 학생들에게 맞추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교육을 위해 돈을 아끼지 않는 우리 부모님의 심리를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미술교사로서 대형 기획 전시를 보면서 공교육에서 미술교과는 시수가 줄고 특히 고등학교는 대학 입시로 인하여 비정상적인 교육과정이 운영되기도 하는 현 상황에서 사람들은 왜 이리 미술 전람회에 열광적인 반응을 보이는가에 자문하기도 한다. 전람회의 관경을 보면 부모님과 동행한 초등학생들이 많다. 아이들의 귀에는 해설이 녹음된 MP3가 꽂혀있다. 작품을 이해하는데 기본적인 지식을 준다는 의미에서는 긍정적인 면도 있으나 똑같은 해설로 인한 개인의 감흥과 진정한 미술비평에 대한 안목을 기르는 데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대형 미
저는 20년 전. 시골 남자 중학교의 유고된 교사의 자리에 부임했습니다. 마침 쉬는 시간이라 남향을 향하고 있는 3층으로 지어진 흰색 교사(校舍)는 더욱 희게 보였으며, 창문마다에는 24살 처녀 선생님의 모습을 보기 위해 새까만 교복에 하얀 이를 드러낸 까까머리 중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설렘이란! 그냥 입가에 미소가 돌았습니다. 교장실에 앉아 남학교에 부임한 햇병아리 처녀 선생님에 대한 걱정스런 당부의 말씀을 듣는 와중에도 교장실 창문에는 마치 두더지 튀어 오르듯 까만 밤송이 까까머리들이 뛰어올랐습니다. 교무실에서 간단한 인사를 마치자마자 교무 부장님께서 수업에 들여 보냈습니다. 전보발령지 하나에 짐을 싸서 학교를 옮겨 다녀야 하고 자신의 대해서는 철저히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공직이라는 것이 이렇게 냉정함을 처음으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첫 월급을 받던 날 기대와 설렘이 있었지만 서무실(행정실)에서 돈 가져가라는 말 할 때까지 기다려 타 온 돈은 일한 것보다는 너무 많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현금으로 월급을 주었으며, 지금 초임 급여에 비해서는 정말 작은 돈 이였고, 주당 수업시간이 27시간이었습니다. 22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면 그 순수
한 해를 마무리 하는 계절이다. 학교는 기말고사를 치고 성적을 내는 과정에 있다. 한 해를 마무리 하면서 혹시 학생을 심하게 혼낸 적은 없는지 반성해 본다. 그렇다면 그 학생을 불러 그 때의 마음을 이야기하고 남아 있는 앙금을 녹여야 할 때이다. 그러면 그 학생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선생님께서 계속 그 일을 마음에 담아두셨구나.” 나는 나의 경험을 통해 사랑의 매의 정의를 내려보고자 한다. 나의 어머니는 불같은 성격을 지니셨고, 반면에 나의 아버지는 물 같은 분이시다. 어머니는 우리가 잘못을 하면 야단과 동시에 빗자루를 집어 드셨다. 그러나 아버지에게는 매를 맞은 기억이 거의 없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나는 선생님이 공연 티켓을 주셔서 전통무용을 보러 간 적이 있다. 선생님께서 나를 예뻐하셔서 주었다고 생각하였고, 같이 받은 학생이 학급의 소위 공부로 잘 나가는 학생들이라, 그 그룹에 낄 수 있다는 기쁨에 부모님이 기다리신다는 것은 뒷전이고 극장 공연을 갔다. 공연이 끝나고 나오니 들어갈 때 낮이었던 것이 밤이 되었다. 그제서야 겁이 덜컹 났다. 나의 집은 시대에서 10여리 떨어지고 밤에는 버스도 들어가지 않는 곳이었다. 발길을 재촉하여 집을 가려면 건
오늘 아침 출근 중에 1층 복도에서 교장선생님이 학생 3명에게 꾸중을 하고 계시는 것을 보았다. 웬만해서는 언성을 높이지 않은 어른이 왜? 무엇 때문일까 생각하고 교무실로 가서 물어보니 학생이 아침부터 행정실로 와서 교실 에어컨을 켜달라고 하다가 교장선생님에게 꾸중을 듣는다는 것이다. 참고로 본교는 개교한 지 2년째인 최신 시설을 갖춘 인문계 고등학교로 교실 위에서 시원한 바람이 나오는 중앙집중식 냉·온방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학생은 시설이 되어 있고 날씨가 더운데 왜 틀어주지 않는가? 라는 입장이고, 나라의 돈을 규모 있게 집행해야 하는 교장선생님으로서는 한 달에 600여만원씩 나오는 전기료를 줄이기 위해 별별 아이디어를 다 짜고 계시는데 이 정도의 날씨도 참지 못하는 요즘 학생들에게 화가 나셨던 것이다. 학부모의 입장으로서는 만이천원을 내고라도 내 자식이 시원할 수 있다면 그 정도의 돈은 충분히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돈은 그 많은 교육세를 집행하면서 국가에서 당연히 충당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국가의 예산기준은 아마 선풍기 기준의 예산으로 일선학교에 보내주고 학교에서는 에너지 사용료로 많이 지출된다면 학생의 교수-학습 활동
이제 전국의 학교에 수학여행 행사는 대부분 끝이 났다. 4월, 5월 고속도로에 길게 늘여서 가던 관광버스는 사라지고 있다. 이 시점에서 수학여행의 선물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이 있다. 요즈음 학생들은 수학여행을 가면 선물을 사오지 않는다. 대부분의 용돈은 청량음료, 아이스크림 등 먹는 것에 지출하고 있다. 그러한 이유를 생각해 보면 두 가지의 원인을 들 수가 있는데 첫 번째로 여행지에서 살 물건이 없다는 것이다. 실용적이고 기념이 될 만한 학생들에게 저렴한 물건이 없다는 것이다. 두번째 가족이나 남에 대한 생각이 과거에 비해 많이 줄었다는 것이다. 자기중심적이고, 내가 선물을 사줌으로써 기뻐할 가족에 대한 배려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의 책임은 부모에게도 있다. 대부분의 부모님은 자녀들에게 “아이들이 사먹을 때 너도 맛있는 것 사먹고 배 골지 말고, 여행지의 물건은 잘 부서지고 쓸모가 없으니 절대 사오지 마라”라고 교육을 시킨다. 교사들 역시 학생들에게 여행지의 물건은 견고하지 못하고 실용성이 떨어지며, 돈만 낭비하니 사지 말라고 사전에 교육을 한다. 이것은 합리적인 소비를 위한 소비자 교육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고등학교 1학년 때 내일을 기약하지 못하시던 할머니의 임종을 지켜보기 위해 거의 한달 정도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우리 집과 멀지 않은 큰댁에서 사시다시피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4명의 딸들이 잠든 방문을 여시며 어머니께서는 “할머니 돌아가셨다”라는 짧은 말을 남기고 미리 준비해 두셨던 흰 상복을 안고 큰댁으로 가셨다. 나의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40대 중반에 들어선 나에게 말로는 다할 수 없는 그립고 아름다운 이름으로 새겨져 있다. 그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내 삶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소중한 보석이다. 나에게 이렇게 소중한 보석을 갖게 해 주신 나의 할머니에게 새삼 감사를 드린다. 나의 할머니께서는 반촌에서 자라 마음만 좋으신 할아버지에게로 시집을 오셔서 평생 길쌈으로 집안을 꾸리시고 밭떼기를 늘리셨다. 한 동네 200여 미터 안에 할머니가 사시던 큰댁과 우리 집이 있었고, 그것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언니보다 활동적이었던 나는 학교를 파하면 집에는 가방만 던져놓고 큰댁으로 갔다. 큰집과 우리 집의 개념조차 없이 큰집을 내 집처럼 지낼 수 있었던 것은 후덕하고 순종적이시던 큰어머니와 할머니의 따뜻한 그늘이 있었기 때문이었음을 안다. 대지가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