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이자 시인이며 극작가인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Victor Hugo, 1802~1885)는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작가로 『레 미제라블』 등 문학을 통해 사회적 부조리와 인간애를 강렬하게 표현했다. 그는 젊은 시절에는 정통왕조주의자였으나 이후 자유주의의 성향을 가졌다가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를 겪으며 민주주의자, 공화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타국과의 전쟁이란 팔꿈치에 입은 찰과상에 불과하지만, 내전은 우리의 간을 먹어 치우는 궤양이다”라고 말했다. 이는 민심이 둘로 쪼개져 큰 정치적 혼란을 겪는 지금 이 땅에 던지는 의미가 매우 크다. 위고는 소설 『93년』을 통해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역사의 흐름에도 개인이 바꿀 수 있는 미래가 있다는 희망을 보여 주었다. 그 희망은 저마다의 ‘도덕적 투쟁’이었다.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숭고한 미덕으로 시대와 맞섰다. 중심인물 중의 하나인 고뱅은 “용서할 수 없다면 승리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전투 중에는 우리가 적들의 적이되, 승리를 거둔 후에는 그들의 형제가 됩시다”라고 말했다. 한 영혼의 어둠을 다른 영혼의 광명이 감싸며 비로소 한 시대가 온전히 구성되고 있는 요즘이다. 이런 교훈을 통해 배우는 지혜가
“내가 학생 가르치는 교사인지, 행정실 직원인지 헷갈린다.” 이는 오래 전에 필자 자신과 주위의 교원들이 자주 하던 말이다. 지금까지도 ‘교원 행정 업무 경감’이란 말은 우리의 학교와 교육계에 널리 그리고 교육환경 개선을 위한 약방의 감초처럼 흔히 사용하고 있다. 이제는 ‘교권 추락’과 ‘교사 때리기’가 성행함에 따라 “이럴 바에야 차라리 교육행정직으로 전환하고 싶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행정업무는 교원들을 옥죄는 주범으로 작용해왔다. 언제까지 교원들의 이런 관행과 실상이 계속되어야 할 것인가? 행정업무 완전 불리는 불가능한가? 아니면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지 않는 것인가? 일찍이 20세기 최고의 천재 과학자라 불리던 아인슈타인은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그 문제를 유발한 제도로는 이를 해결할 수 없다”는 말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시대는 지났어도 여전히 이에 강한 공감을 표하고자 한다. “사람이 바뀐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시스템이 문제다”라는 말도 이와 아주 유사한 맥락이라 할 수 있다. 이 땅의 교원들이 오랫동안 간절히 원했고 틈만 나면 감축을 주장하던 행정업무는 교사의 교육활동과 더불어 학교의 두 개의 핵심 축으로 정착한지 오래다. 설상가상으로 코
대한민국 유초중등 교육계에 멘토와 같은 지성인이 정년퇴임을 하게 되었다. 최근 지방 언론에 의하면 "대한민국 교육 더욱 빛나게 노력할 것"을 다짐으로 박남기 광주교대 교수(제5대 총장)가 제자들과 함께 퇴임식을 하며 지난 32년간의 교육 여정을 마무리함을 보도했다. 필자와는 1960년생 동갑내기이고 출신 대학과 봉직한 학교급은 달랐지만 같은 교육계에 종사하며 필자가 닮고 싶은 큰 바위 얼굴로 늘 가슴 속에 존재했다. 그는 뛰어난 학력과 지성으로 대학에서 예비 교사들을 가르치는 데 큰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강연과 글로써 이 나라 교육에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교사들의 정신적 멘토가 되어 격려와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필자는 인천의 J고등학교 교감 시절에 고교학점제 연구학교로서 초청 강사로 모셔 강의를 듣고 면전에서 직접 뵙고 인사를 나눈 적이 있을 뿐이다. 박 교수는 워낙 활동 반경이 넓어 이 순간을 기억하지는 못하겠지만 필자는 그의 강의를 들으면서 필자보다는 훨씬 넓고 다양한 영역의 교육계 내에서 왕성하게 활동을 하는 모습에 부러움과 함께 그날 그의 강연 내용에 진한 공감을 표하며 마음속의 교육계 동지로 존경의 마음을 품었었다. 그는 외적으로도 살아
우리 선생님들은 아직도 많이 아프다. 할 말이 많아 응어리진 그들의 가슴은 답답함과 우울함, 분노로 숨조차 쉬기 어렵다. 가르치는 학생으로부터, 그들의 보호자인 학부모로부터, 그리고 학교 밖 사람들로부터 인격을 침해당하고 상처를 입고 신음하며 아파하고 있다. 상처에 신음하고 아파하는 현장 어느 교사는 학부모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폭언을 듣고 수치심과 절망감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자존감과 교사로서의 권위가 종잇장처럼 찢겨졌다. 그 후 해당 교사는 학교에 나오지 않다가 결국 극단적인 선택으로 생을 등지고 말았다. 이런 유사한 일이 지금도 전국 학교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다. 사실 이런 폭언을 쏟아내는 학부모는 ‘감정보복’ 또는 ‘교사 때리기’로 교사에게 깊은 상처를 준다. 교사들은 그 속에서 삶의 의미와 존재 가치를 상실한 채 실의와 절망에 빠진다.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 여겨 좀비처럼 살아가도록 만드는 작금의 이런 일은 결국 누구에게 피해가 돌아갈까? 사회학자 엄기호 교수는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에서 오늘날 교무실의 모습을 ‘태평양에 떠 있는 섬들’이라 표현했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교사들 사이엔 무수히 많은 섬이 존재하고 관심과 대화와
왜 대한민국 교육이 배출한 다수의 엘리트들은 ‘공부머리’와 ‘일머리’가 조화를 이루지 못할까? 매번 새로운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입각하는 국무위원들을 비롯한 장⋅차관급 엘리트들은 대부분 대한민국 학벌(學閥)의 정점에 있는 특정 대학 출신들이다. 이를 뒷받침 하듯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역대 최고 인사권자들조차 국정 인사 때마다 “어느 대학 출신인가?”라고 물을 정도로 처음부터 특정 대학 출신의 선호가 심각한 것으로 전해진다. 우리가 인정하는 것처럼 대한민국의 엘리트들은 우리 교육이 낳은 ‘공부머리’가 탁월한 최고의 인재들이다. 대개는 예비고사 출신인 60대 이상과 학력고사 출신인 50대 이상으로 고교생 시절에는 뛰어난 학력(學力)을 소유한 ‘공부의 달인’으로 불렸다. 그들 중에는 대학 재학 중에 사법고시 및 각종 국가고시에서 두각을 나타낸 영재들도 많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국민들이 바라고 기대하는 만큼 ‘일머리’에는 적잖은 부실함과 심지어 도덕성, 인성조차 미덥지 못한 경우가 많다. 설상가상으로 그들은 집단의 토의⋅토론에 약하고 상명하복식 명령체계, 권위의식에 남달리 매우 강하다. 우리 교육이 낳은 엘리트들은 특히 집단의 토의⋅토론과 논리적 수사에 익숙
성공학의 대가인 스티븐 코비는 포브스가 선정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경영 도서 중의 하나이자 자기계발서로 유명한 저서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에서 주도성(主導性)을 ‘proactivity’라고 지칭하고 있다. 그는 “주도성이란 단어를 요즘 경영학 문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지만, 대부분의 사전에서는 찾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솔선해서 사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이 말의 의미는 스스로의 삶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우리가 주도성이라 하면 보통 자율성의 의미로 받아들이지만 정작 책임감에 좀 더 무게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학교 교육을 말할 때 교사의 주도성을 핵심으로 내세우곤 한다. 하지만 주도성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있는 속성이 아니다. 또한 고정불변의 것도 아니다. 우리는 너나 없이 모두 주도성이라는 특성을 간직하고 있다. 이는 개인의 역량과 환경 조건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비로소 그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간직하고 있는 또 다른 주도성이 발현되도록 도와주는 것이 교사 주도성의 역할이라 할 것이다. 여기엔 학생에 대한 지지와 격려, 상호작용과 소통이라는 과정이 수반된
학생들이 교사를 부모처럼 생각하거나 친구같이 여기는 것이 관계 맺기의 시작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조건이 필요하다. 교과 담당으로서 또는 학급담임으로서 아이들 학교생활에 대해 작은 것부터 세밀하게 신경 써야 한다. 정기적 대화로 유대관계 형성해야 교사는 학생 성장 과정에서의 신체 변화를 인지하고 학습 분위기를 역동적으로 바꿀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해야 한다. 학생 중에는 학교에 나오는 것을 힘들어하는 경우가 있으며 공부에 흥미를 잃거나 친구, 가족과 싸우기도 한다. 쉽게 우울해지기도 하고 그냥 앉아서 멍하게 있거나 잠만 자며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이럴 때 교사는 눈을 마주 보고 ‘요즘 어때?’ ‘혹시 무슨 문제 있어?’ ‘어떻게 하면 좀 더 기분이 좋아지겠어?’와 같은 질문이 필요하다. ‘예’ ‘아니오’ 같은 단답형 대답이 아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도록 유도하면 힘들게 세상나기 하는 학생들에게 심폐소생술 효과를 발휘한다. 어려움에 처한 학생이 어떠한 도움도 받지 못한다면 학교생활이 힘들어질 뿐만 아니라 그 영향이 상당 기간 지속될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자퇴로 인해 학교 밖 청소년으로 신분이 바꾸기도 한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학생들과
“장래 희망이 무엇이지?” “공무원이요” “그래? 왜 공무원이 되고 싶어?” “안정적이잖아요. 요즘 세상에 안정된 직업이 최고 아니에요?” “글쎄,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 그런데 공무원 시험이 어렵지 않아?” “예, 그래서 붙을 때까지 공부해서 꼭 합격할 거예요.” 이는 근래, 필자와 중학교 3학년 학생과 나눈 대화다. 아직은 진로 선택의 기로에 선 이 학생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학생들도 공무원이 되고 싶어 한다. 그 이유는 하나같이 안정적이고 신분이 보장되는 소위 철밥통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중에서도 교사가 되겠다는 학생도 상당하다. 그 이유 또한 다르지 않다. 최근 몇 년간 교육부에서 조사한 학생들의 희망 직업 순위를 살펴보아도 여전히 공무원과 교사가 상위권을 차지한다. 물론 경제가 어려운 직접적인 영향이기도 하다. 공무원이나 교사가 되겠다는 것 자체가 나쁜 것도 아니다. 다만 하고 싶은 것이 많을 청소년들에게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말이 무색하다는 것이다. 꿈을 꾸고 도전할 나이에 단지 안정성이란 이유에만 묻혀 ‘우물 안 개구리’ ‘고인 물’이 되고자 한다. 어느 면에서는 꿈을 포기하고, 또 심지어는 꿈꾸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고 거
지난 8월 40여 년의 교직을 마무리했다. 학교의 최고 경영자이자 교직의 꽃이라 불리는 교장을 수행하면서 책임과 봉사, 그리고 학생 교육에의 투철한 교육철학이 왜 필요한지를 실감했다. 한편으로는 인고의 세월을 잘 버텨낸 것이 감개무량하고 그저 한여름 밤에 긴 꿈을 꾼 것 같은 느낌이다. 오늘이 있기까지 감사하는 마음과 함께 학교장으로서의 교육 리더십을 되돌아보며 감회를 밝히고자 한다. 교사들의 자존감 높여줘야 오늘의 학교 현장은 너무나 다양한 삶의 군상을 포용한다. 쉴 틈조차 없이 공부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학생들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교사들의 고충과 애환은 ‘상실의 시대’와 ‘상처 시대’ ‘생존권 확립’의 시대로 상징된다. 우선 교사들에게 필요한 것은 작은 관심과 격려다. 누구나 인정받고 싶어 하는 인간의 본능에 따라 교사들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 학교장이 간직할 최고 경영자의 역할이라는 것을 직언하고자 한다. 여기엔 늘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입장이 되어 학교장은 교직원을 격려하고 칭찬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 이는 ‘사람이 우선이다’, ‘사람 사는 세상’ 등 인간중심 사상, 즉 휴머니즘을 지향하는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