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래 희망이 무엇이지?” “공무원이요” “그래? 왜 공무원이 되고 싶어?” “안정적이잖아요. 요즘 세상에 안정된 직업이 최고 아니에요?” “글쎄,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 그런데 공무원 시험이 어렵지 않아?” “예, 그래서 붙을 때까지 공부해서 꼭 합격할 거예요.” 이는 근래, 필자와 중학교 3학년 학생과 나눈 대화다. 아직은 진로 선택의 기로에 선 이 학생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학생들도 공무원이 되고 싶어 한다. 그 이유는 하나같이 안정적이고 신분이 보장되는 소위 철밥통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중에서도 교사가 되겠다는 학생도 상당하다. 그 이유 또한 다르지 않다.
최근 몇 년간 교육부에서 조사한 학생들의 희망 직업 순위를 살펴보아도 여전히 공무원과 교사가 상위권을 차지한다. 물론 경제가 어려운 직접적인 영향이기도 하다. 공무원이나 교사가 되겠다는 것 자체가 나쁜 것도 아니다. 다만 하고 싶은 것이 많을 청소년들에게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말이 무색하다는 것이다. 꿈을 꾸고 도전할 나이에 단지 안정성이란 이유에만 묻혀 ‘우물 안 개구리’ ‘고인 물’이 되고자 한다. 어느 면에서는 꿈을 포기하고, 또 심지어는 꿈꾸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고 거부하면서 살아가려고 한다. 그렇다고 아이들을 탓할 수도 없다. 왜냐면 우리 사회의 견고한 틀과 교육이 안정 구조에 맞춰 살기를 강요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지금도 상당히 많은 부모들이 고정된 틀 안에서 다른 생각하지 않고 잘 자라야만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 주입시킨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받아 온 교육을 그대로 세뇌하고 있다. 그래서 혹시나 아이들이 자신의 의지를 반영하여 틀을 깨고 나갈 것을 선언하면 기겁을 하고 왜 쉽고 편한 길을 놔두고 어렵고 힘든 길을 가려하냐고 면박을 주고, 심지어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고 악담 내지 협박까지 한다. 그래서 주눅이든 청소년들은 일찌감치 도전보다는 안주를 지향한다. 그러니 실패를 감수하면서 마음껏 시도하고 도전하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아직도 우리 기성세대는 어른들이 권하는 길을 잘 따라가고 만들어준 틀에 잘 순응하면 성공한다는 달콤한 유혹으로 청소년들을 유도한다. 이것이 때로는 우연한 성공 스토리를 창조해 강력한 신화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침소봉대(針小棒大)에 지나지 않는다. 아예 처음부터 청소년에게 실패에는 어떤 가치가 있는지, 또 다른 길은 무엇인지, 하는 물음과 호기심이 존재할 수 없게 만든다. 하지만 청소년들에게 실패는 충분한 의미와 가치가 있다. 그들에게 실패가 곧 끝이나 다름없다고 간주하거나 실패의 가치조차 언급하지 않는 것은 죽은 사회다.
그렇다면 기존의 틀에 맞춘 삶은 행복을 가져다줄까? 안타깝게도 변화무쌍한 현실 세계에선 딜레마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이를 일찍이 헤르만 헤세는 설파한 바 있다. 그의 성장소설 『데미안』의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하나의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처럼 청소년들은 알 밖의 더 큰 세계의 존재를 깨닫지 못한다.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나중에 틀을 깨고 나가려 도전해 보지도 못했던 자신보다는 자신을 그렇게 틀 속에 가두고 주저앉힌 부모와 사회를 원망하는 것이다.
최근 곳곳에서 혐오와 증오가 난무하며 ‘묻지마 범죄’로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현상도 그 근원은 바로 편협한 가치관 때문이다. 청년들의 무개념적 행동과 각종 살인, 폭행 사건들의 악순환은 결국 정체된 삶을 조장하는 기성세대에게 먼저 책임을 물어야 한다.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도전에 대한 의식과 용기를 상실한 채 사회가 자기를 버린 것으로 간주하는 사고는 결국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지 묻고 싶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54만여 명의 청년들이 부모에게 의지한 채 캥거루족이 되어 그냥 쉬고 있다 한다. 이제 가정, 학교, 사회와 국가가 연대하여 청소년들이 하나의 알을 깨고 알 밖의 세계로 과감하게 투신하도록 교육에 힘쓰고 사회 구조와 각종 제도를 정의와 공정, 나눔과 배려, 원칙과 상식, 도덕과 평등의 정신으로 혁신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