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나타나고 있는 교육 용어 중 하나가 틈새교육이다. 학교의 공식적인 일과표를 찾아가다가 보면 나머지 시간에는 무관심으로 일관되기 마련이다. 그런 가운데 단조로운 시간이 주는 지루함과 따분함이 때로는 수업에 대한 피곤함을 학생들에게 제공할 때가 많다 그러기에 수업 중에도 짬을 내는 틈새교육은 수업효과를 배가 시키는 힘이 된다. 틈새교육이라고 해서 꼭 틈이 있어야만 틈새교육이란 이미지로 부각되는 것은 아니다. 정규 수업 시간에도 틈을 내어 교육시키는 인성교육, 생활지도, 성교육 등등은 새로운 이벤트 틈새교육 품목으로 자리매김되어 가고 있다. 틈새교육은 무크지 시대의 부활 무크란 잡지(magazine)와 서적(book)의 합성어이다. 무크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1971년 런던에서 개최된 국제잡지연맹의 제18차 회의에 제출된 보고서에서였다. 1973년 석유파동 이후 두드러진 서적의 판매량 감소에 대처하는 방안으로 나온 무크지 분야는 문학,·요리,·패션 등 다양했다. 특히 잡지와 달리 부정기적으로 간행되면서 시각적 요소를 강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한국에서는 약 90년대부터 환경, 교육, 법 등 특정 분야를 집중적으로 다룬 무크지가 다수 나와 기획출판의
며칠 전, 고교 교사가 학생 진학지도로 인해 과로로 쓰러졌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매스컴을 울렸다. 교사가 진학 지도에 헌신한다는 한국 사회의 아우성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듯 스쳐 지나가건만 뉴스를 볼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왠지 봄바람을 맞는 기분이 아닌 듯하다. 밤낮을 하루같이 학생 지도에 열정을 바치는 것은 교사의 마음이겠지만, 열정이 화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자신을 뒤돌아 볼 줄 모르고 몸바치는 교사의 노고가 학부모를 비롯해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애도를 받지 못하고 허공에 떠 도는 봄꽃의 향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현장을 지켜가는 교사의 마음을 더욱 슬프게 느껴지고 있음은 무엇 때문일까? 학생을 위한다는 미명하에 교사의 복지는 후진국 양상 인문 고교 현장을 지켜가는 학교에서 당연히 햇볕을 보고 퇴근을 하는 교사는 많지 않을 것이다. 특히 인문계 교사들의 이른 퇴근이 왠지 불안스럽게만 느껴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교사의 체력 관리는 뒷전이고 학생들의 체력 관리도 뒷전인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그렇지만 아침이면 빠른 등교를 종용해야 하는 정문 지킴이 교사, 교실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시작해야 하는 영어 듣기 방송, 밤늦도록 진학 지도를 위해 교무실
갈수록 교직 사회가 학생들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다양한 콘텐츠를 개발하는 데 열정을 쏟고 있는 분위기다. ICT 활용 수업 발표 대회는 그 단적인 증거를 제공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이 만들어지고 이를 활용할 줄 아는 교사들의 노력도 다양하게 나타나면서 수업에 대한 교사의 열정은 학생을 향한 혼심의 전달로 치닫고 있다고나 할까? 아무리 많은 것을 불어 넣으려 해도 학생들이 이를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열려 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일방적으로 단정해 버리는 것이 교사들의 보편적인 생각이었다고 하면 지나친 억설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돌처럼 굳은 마음도 수업에 혼을 불어 넣는 교사의 열정 앞에서는 고개를 들 수 밖에 없다는 것이 현장 교사는 느끼는 바다. *1등 교사의 수업은 가르침에 혼을 넣어* 요즘 교사들은 학생들이 무섭다. 요즘 학생들 참으로 다루기 어렵다. 한 시간 넘기기가 너무나 힘들다라고 내뱉는 경우를 허다하게 들어 본다. 말과 행동에서 교사는 자존심을 지켜가고, 학생은 교사의 바른 말과 확고한 태도에서 존경을 표출하게 마련이다. 학습과 환경, 환경과 생활지도, 생활지도와 바른 학습 관계는 서로 공생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하여도 거짓말
싱그러운 봄의 향기가 서서히 코끝을 여미게 하는 요즘 새학기 시작으로 분주한 시점에 한 편의 글을 쓰고 싶은 생각이 불현듯 일어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새 학교에 대한 색깔있는 모습에 반한 것일까 아니면 새로운 마음으로 새롭게 다져가야 할 새 정부의 전령사가 되었기 대문일까 피어나는 꽃잎을 보며 우수에 잠기게 된다. 학교의 문화는 학교의 주인의식이 있는 자가 한 나라의 문화는 그 국민이 만들어 가는 것이고, 그 사회의 문화는 여론의 향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고, 한 집안의 분위기는 아버지의 지도력에 의해서 좌우되듯, 한 학교의 문화 또한 탁월한 관리자의 지도력에 의해서 좌우된다는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우수한 교사도 우수한 학생도 탁월한 지도력이 부재한 학교에서는 그 존재 가치를 발휘할 수 없는 것도 환경이 주는 영향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느끼게 하는 것 같다. 일치된 학교, 단합된 모습 그것이 바로 그 학교의 미래의 응집력이고 구성원이 생활하는 행복의 첩경이라고 하면 그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아침에 교무실에 들어오면 안녕하세요 하는 말이 여기저기서 솟아날 때의 모습과 자기의 일을 한답시고 앞만 쳐다보고 있는 교무실 분위기는 대조될 수밖에 없는 것이
다사다난했던 정해년! 뒤돌아보면 말도 많고 사건도 많았던 교육부의 정책이 새 정부에게 어떻게 비춰질지. 현장에서 지는 해를 바라보며 조용히 펜을 들어본다. 숱한 사연을 안고 현장을 파고들었던 교장초빙제, 평교사들의 소망을 송두리째 담고 있던 수석 교사제, 명예를 먹고 사는 교사들의 승진에 관련된 교원평가제, 교사들의 복지를 위한 교사연구안식년제와 교사성과급제 등등은 새 정부에게 짐이 되기도 하겠지만 새 정부가 꼭 해결해야만 하는 과제이기도 하다. 교장초빙제 이렇게 생각하다 교장 초빙제가 한국의 교육풍토에 정착되기에는 아직도 이르다는 느낌을 받는다. 교장 초빙제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현직 교장들의 초빙제의 조건을 강화시켜 새로운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 급선무일 것이다. 교장초빙제의 문제점은 능력있는 교장을 초빙하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장 임기를 채우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것에 현장 교사들은 문제점을 제시하고 있다. 게다가 교장초빙제에 따라 초빙 교장이 데리고 가는 교사 초빙은 능력에 따른 초빙보다는 학연과 지연에 따른 불합리성이 또 제기되고 있다. 우수한 교장을 초빙하여 우수한 학교를 만들자는 취지는 초빙에 따른 피그말리온 효과를 창출해 보자는
공교육의 부실이 청소년의 인성교육의 부실로 이어지고 인성교육의 부실은 기성세대들의 신세대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공원에서 교복을 입은 채로 성행각을 벌리는 장면이 인터넷으로 떠돌면서 화제가 되고 있다. 거리에서 고교생들이 남녀끼리 손을 잡고 걸어가는 것은 이미 보편화되어 있다고는 하나 그 도를 넘어서는 행위가 주위를 아랑곳하지 않게 한다는 데서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가정에서 잠재되어 습관화되는 인성교육은 공동체의 의식을 펼쳐가는 데 초석이 된다. 그러기에 학교를 떠난 거리에서도 도덕적 인간으로서 양식있는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되고 나아가서는 웃어른들을 보고도 인사를 할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된다. 바른 성교육이 바른 인간다움을 형성시킨다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정화시킬 줄 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까? 성교육, 전교사 전천후 교육으로 교실에 들어가 수업시간에 성교육을 배우는 시간이 있는냐고 물어보면 없어요 하는 소리를 예사로 듣는다. 성에 대한 관심이 그만큼 많은 시기에 성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도 제공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교육과정에 새로운 안이 필요한 것 같다. 대학의 성강좌에 대학생이 우르르 모여드는 현상. 이것이 참교육의 진실
교직에 오래 머무르다 보면 어느 듯 자신도 모르게 로봇 교사가 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게다가 원로 교사에 가까운 나이에 있으면 더욱 그러한 느낌을 받게 된다. 담임도 없고 자신이 연구하려는 뚜렷한 과제도 없을 때는 무료한 시간이 자신의 세월을 낚는 낚싯대와 같은 것은 아닌지 하는 사고의 무력감에 빠지기 싶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한 권의 잡지가 아닐까? 교사이기에 교육 잡지를 구독하다 보면 지나간 그림자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어 회상의 경지로 빠져들게 하는 좋은 자료가 때로는 되기도 한다. 학생을 가르친다고 교과서 교재를 연구하다 보면 교과서대로 가르치는 시간에는 학생들이 자는 경향이 늘어날 때가 많다. 가르치면서 유머를 석어가는 미담은 한 권의 잡지에서 얻은 글들이 된다. 학생들이 재미없어 할 때나, 학습에 무관심으로 일관할 때는 추억의 소리가 이들의 머리를 깨어 있게 하는 좋은 자료도 된다. 학생들의 마음을 읽어 가는 데는 말로 가르치는 교사라 할지라도 말보다는 소리가 더 필요할 때가 있고, 소리보다 그림이 때로는 더 필요할 때가 있다. 학습법이 좋아야 학생이 졸지 않는다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양질의 학생이 앉아 있는 교실에서는 교수
대수능이 끝나고 수시 2-2에 서울 모 대학 모 학과에 100대 1이라는 경쟁률을 기록하였다. 너무나 놀라 그 대학의 홈페이지를 열어 보았더니 놀랍게도 전학과가 50대 1은 기본으로 돼 있을 정도였다. 무엇이 이런 소동을 불러 일으켰을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묻지마 지원학과를 선택하게 하였을까? 예전 같으면 인기없는 학과라고 하여 지원율도 높지 않았을 터인데 이렇게 많은 학생이 지원하는 이면에는 불안으로 인한 사전 포석도 있겠지만 중위권 학생들이 서울에 붙고 보자는 마음이 더 높은 것으로 추측된다. 소신있게 지원하자니 브랜드 대학에 밀려 한숨짓고 수도권 대학에 진학하고자 하는 마음이 어느 수험생 치고 없겠느냐만은 시골 학생이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려고 하면 그 비용이 무시할 수 없게 많이 소요된다. 또 수도권 학생이 지방에 내려가 유학을 하자고 하니 수도권에 있는 것보다 과외로 소비되는 비용 또한 무시할 수 없이 필요하게 된다. 이래 저래 중간 로선을 타고 달려가는 수험생 인생의 열차는 수험생을 정차하는 역마나 한명씩 한명씩 내려 놓고 마지막 종착역에서는 내리지 않을 수 없는 운명의 수험생에게 떠나는 열차의 기적 소리는 처량하게만 들려올 뿐이다. 학창시절에
사람이 태어나 학교를 거치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마치 통과의례인 양 시험이라는 과정을 접하게 된다. 그 중에서 인생의 승패를 걸어야 할 만큼 중요한 시험도 그렇지 않은 시험도 간혹 있기는 하다. 그 중에서 특히 고등학교 시절에 치루는 시험은 한 인생의 앞날의 기로를 정해주는 중요한 기로이기도 하다. 인문계 고등학교에 입학하면 3월 달이면 치루는 외부 학력고사는 학생들의 그 동안의 성취도 평가의 대상이 된다. 그러하기에 이 시험을 전국적으로 치루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또 대학을 지망하는 데 중요한 열쇄도 된다. 하지만 시험이 단순히 자신의 평가에 그치기 때문이 이번에 못 보면 다음에 잘 보면 되지 하는 단순한 생각을 학생들에게 갖도록 하는 계기가 된다는 면에서도 학력고사에 대한 새로운 대안이 필요할 것 같다. 목표의식 없는 시험은 성취도 평가에 어려움 있어 시험을 치루는 데는 반드시 목표의식이 있기 마련이다. 전국학력고사도 학생들의 자기 성취도 평가라는 의식이 그 속에 살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반영되는지에 대해서는 1학년의 경우는 잘 알 지 못하기 때문에 시험에 응하는 자세 또한 진지하지 못하다. 또 2학년의 경우도 시험 자체가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최근 어느 모 고등학교 교사가 죽도(竹刀)로 학생을 때리는 장면이 인터넷으로 공개됨으로써 항간에 화제로 떠올랐다는 뉴스는 이미 보도된 바 있다. 어느교실을 들여다 보아도 해밝은 얼굴에 배움을 향한 의욕으로 가득차야 할 것이지만 요즘 학생들의 학구열은 그렇게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 것이 특징인 것 같다. 담임이 잘못한다고 꾸짖고 매라도 한 대 때리면 즉시 거부 반응을 일으키고 심지어 좀 더 심하게 학생을 다루면 가방을 싸서 교실문을 꽝 소리내어 닫고 나가 버리는 현실을 목도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회초리 사랑은 학생지도의 타이름의 경계 사랑이 교육의 최고다라는 말은 참으로 참진리인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도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사랑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학생을 지도할 때도 학생개개인의 특성에 따라 지도를 달리하여야 한다. 사랑이 교육의 기초를 다지는 지름길도 되지만, 사랑 속에 자리잡아야 할 타이름의 경계를 분명하게 주입시켜 두어야 한다. 수업 시간에 통제를 느슨하게 하면 수업 시작과 동시에 화장실에 가는 나쁜 버릇을 만들어 주게 되고 수업 중에 물을 마시러 가는 버릇조차도 발생하게 된다. 한 시간의 수업이 바로 되기 위해서
김포 외고를 지나 10분 정도 지나가면 강화읍이 나온다. 조그마한 읍이지만 지나오는 길 에 늘 김포 외고를 보노라면 저녁 늦게까지 온 교실이 밝은 등불로 독서에 매진하는 학생들의 학구열에 감탄을 자아내곤 했다. 역시 외고는 외고답다라는 말을 일요일 저녁에 강화읍 관사로 들어올 때마다 강화고 학생들에게 이런 풍경을 말해 주어 선의의 경쟁을 불러 일으키는 데 도움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늘 가슴이 뿌듯하게 솟구치곤 했다. 이런 외고가 어느 날 매스컴에서 시험지 유출 그것도 신입생 선발 시험지 유출로 외고가 아닌 외진 곳에 숨어서 부정을 저지르는 외로운 학교로 낙인찍히게 됨으로써 평소 좋은 이미지를 가졌던 지난날의 영상이 냉장고의 냉동어처럼 돼 버린 기분이었다. 우리의 교육계는 실패의 연속선상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 가기보다는 실패를 실패로 이끌어 가기 때문에 교육계가 비난을 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받는다. 민족사관학교의 실패, 금호공고의 실패, 과학고의 실패, 외국어 고의 실패 등등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변형된 길로 줄달음쳐 가고 있음도 현실에서 느끼고 있다. 고교의 기능이 대학을 가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교육비를
각 급 학교에 전달될 성과급 논의가 각 학교에서는 한창 진행중이거나 이미 결말을 지운 학교가 대부분일 것이다. 아무리 논의를 해도 무엇으로 교사들의 등급을 매길 것인지에 대한 관리자의 장고(長考)로도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기에 균등분배라는 최후의 안을 냄으로써 교사들의 불만을 잠재울 수 있고, 또 관리자는 채점이 곤란한 현재의 성과급 등급 매김에서 불거져 나올 오류를 막을 수 있다는 점에서도 성과급 균등분배는, 교육부 방침에는 어긋나지만 현장 교사들은 찬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교육부는 알 필요가 있다. 성과급이 학교 현장에서 그 평가의 어려움이 공존하고 있다는 데에 새로운 대안이 무엇보다도 시급하다고 하겠다. 성과급, 학교급별 평가 방향 설정에 관심을 학교 평가를 하는 데 있어 지금의 학교체제로는 학교마다 그 평가 기준을 달리할 필요가 있다. 초등학교에서는 인성 교육에 중점을 두는 방향으로 하여 인성 프로그램 개발에 평가의 초점을 두고, 그 시범학교를 통해 학생들의 인성을 바로잡아 가는 방안에서 학교 평가가 이루어져야 중학생이 되어도 고등학교 학생이 되어도 바른 인성에 바른 생각을 갖는 마음이 어느 정도 채워지지 않을까? 중학교의 경우는 진로
며칠 전 서울 모 초등학교에서 일어난 학부모의 교사 폭력사건은 교권 침해를 넘어 인간의 존엄성마저 무너져 가고 있는 느낌이다. 또 전북 전주시 모 고교 교사가 학생을 죽도(竹刀)로 심하게 때리는 동영상이 인터넷에 떠돌면서 논란을 빚고 있다. 학교와 학부모 그리고 학생과의 관계가 따로국밥 양상이다. 학부모는 학교 교실까지 들어와 교사를 폭행하는 교권의 침해가 극에 이르렀고, 학생들의 자유방만함은 교사의 권위마저 무너뜨리는 상황으로 이어가고, 관리자는 학부모와 교사를 통제하지 못하는 무방비 무사안일주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학교는 무법천지의 천국 배움을 위해 찾아들어야 하는 신성한 학교가 온통 범죄의 온상이라는 이미지를 풍기고 있다. 아무리 교사가 학생을 때렸기로서니 학생이 그것을 비디오로 찍어 인터넷으로 유포하여 교사의 비윤리적인 치부를 드러내 보임으로써 학생 앞에서 떳떳해야 할 모습이 파김치로 돌변해 버린 것이다. 교사를 바라보는 학생들의 시선, 학생을 바라보는 교사의 시선, 모두가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다. 시대의 흐름으로 보면 “뭐 그럴 수 있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해도 인간이 살아가는데 지켜야 할 규범은 존재하는 것이다. 학생이 자신의 스
교육부에서는 교사 성과급을 11월 중에 지불하겠다고 공언한 것 같다. 현장에서는 그것에 대한 반대가 계속되고 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교사 성과급을 놓고 시비를 가리자는 의미인지는 모르겠으나 현장을 지켜보는 교사의 입장에서는 교사 성과급은 궁극적으로 교사 자격 인증제로 이끌어 가려고 하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것 같다. 교사 자격 검증제가 인증제로 변한다고 해도 교사의 질이 높이지기보다는 교사들 간의 갈등만이 드높을 것으로 여겨진다. 교사를 질 높은 수준으로 이끌어 내기 위한 교사 성과급은 교육부의 고리대금업 체제라는 비난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성과급은 초중고 평가 달리 해야 성과급은 성과를 이루어 내는 자에게 주는 성공보수다. 그런데 생산적인 일을 하는 데 근무하는 자와 비생산적인 데서 근무하는 자와의 평가를 똑같이 한다는 데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교사가 생산적인 일을 한다고 해서 즉시로 그 결과를 도출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교사를 평하는 데도 평가 분야를 달리할 필요가 있다. 초등은 인성지도 중심으로, 중학교는 진로지도 중심으로, 고등학교는 진학과 취업 지도를 중심으로 교사를 평가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학교
열린 교육을 자랑하는 교육청! 열린 행정을 자랑하는 행정 관청! 진정 진실일까? 의구심을 뿌리칠 수 없다. 교육행정시스템을 클릭해 보면, 화면에 바로 뜨는 것은 “대국민 서비스 질 향상, 교육행정의 효율성 투명성”이라는 표제가 선명하게 시야에 떠오른다. 두 달 전 인천광역시 교육청에서 일어난 일이다. 교육감을 만나기 위해 교육청을 찾았으나 교육감을 만날 수가 없었다. 교육감에게 진정해야 할 일이 있고 그 밑에 담당자에게 진정해야 할 일이 진정인에게는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무조건 교육감을 만나는 것 자체가 금기시돼, 순서를 밟아라. 여기서 됐다 등등으로 교육관청이 권위를 내세운다면 오늘의 열린 행정의 서비스는 대민봉사 차원에서 행하는 겉치레가 아닐까? 먼저 교육감실 문을 활짝 열어야 교육의 창이 활짝 열리는 것은 아래로부터의 통로가 열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의 통로가 활짝 열리는 것을 의미한다. 교육청의 장이 교육에 관한 애로 사항을 건의하고 민원을 제기하러 왔는데 교육감실이 닫혀 있고, 부교육감실이 닫혀 열리지 않는다면 그것이 진정 열린 행정의 표본일까 가식적인 행정의 표상일까? 교육감과의 대화가 되지 않아 민원인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