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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라이프&역사] 타인능해(他人能解)의 땅, 구례

‘방귀 길 나자, 보리양식 떨어진다’라는 속담이 있다. 6월에는 24절기 가운데 9번째에 해당하는 ‘망종((芒種)’이 있는 달이다. ‘망종((芒種)’은 일 년 중 논보리나 벼 등 곡식의 씨를 뿌리기에 가장 알맞다는 날이다. 보리를 수확하며 굶주림의 시기였던 ‘보릿고개’를 살아서 넘기게 되는 것이다. 

 

‘보릿고개’ 시기에 생각나는 곳이 있다. 바로 지리산 남쪽 끝자락인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있는 목조 기와집으로 조선 후기의 누정(누각과 정자를 함께 일컫는 것으로 ‘정루’라고도 한다) ‘운조루(雲鳥樓)’다. 운조루는 중요민속자료 제8호로 조선 영조 때 낙안군수를 지낸 류이주(柳爾胄:1726-1797)가 영조 52년(1776) 지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우리의 전통 누정인 운조루는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 사는 집’이라는 뜻으로 오미동 류씨 집안 사랑채다.
 

류이주는 조선 후기 무신이자 건축가로 대구에서 태어나 17세에 한양으로 올라와서 영조 29년(1753), 28세에 무과에 급제했다. 영조 43년(1767) 수어청 별장으로 남한산성을 쌓는 데 참여했고, 영조 47년(1771)에 홍봉한의 추천으로 전라도 낙안군수로 임명됐으나, 당쟁에 휘말려 함경도 삼수로 유배됐다. 
 

류이주는 정조가 즉위하자 정3품 오위장에 복직하여 함흥성과 수원성을 쌓았고, 평안도 용천부사와 함경도 삼수부사를 역임했으며, 정2품 자헌대부로 승진했다. 류이주는 벼슬에서 물러난 뒤 낙안군수 재직 당시 보아두었던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로 내려와서 한가로이 지냈다. 

 

‘금환락지(金環落地)’의 땅

 

조선시대에 새로운 지역으로 이사를 한다는 것은 엄청난 부담을 가지는 것이다. 그런데도 류이주가 구례로 간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조선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 책이 바로 이중환이 지은 <택리지>이다. <택리지>는 지리 백과사전으로, 붕당으로 어지러운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 새로운 삶의 방식과 앞으로 살아야 할 곳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 이 책을 보고 자신과 후손들이 정치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고 살만한 지역을 찾던 류이주가 낙안군수로 재직 중 보아두었던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로 왔던 것이다.
 

운조루는 산과 연못으로 둘러싸여 있어 ‘금환락지(金環落地)’로 불렸다. 금환락지는 선녀가 땅에 내려와 목욕하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다가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형국을 뜻한다. 또한 땅속에서 거북 모양의 바위가 나온 곳이기도 하다. 게다가 경치가 빼어나고 토지가 비옥하며 섬진강과 가까워 뱃길이 있어 물산이 오가는데 편리한 지역이었다. 
 

운조루는 송나라의 시인 도연명의 칠언율시인 귀거래사(歸去來辭)의 머리글자에서 따와 지은 것이다. 

 

雲無心以出岫(운무심이출수:구름은 무심히 산의 바위틈에서 나오고) 
鳥倦飛而知還(조권비이지환:새는 날기에 지쳐 집으로 돌아올 줄을 아는구나.)

 

1793년에 류이주가 두 아들에게 재산을 나눠주기 위해 작성한 ‘장자구처기(長子區처記)’와 1800년대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전라구례오미동가도(全羅求禮五美洞家圖)’에서 운조루가 지어질 당시의 규모와 모습을 추정할 수 있으며, 2007년 문화재청의 실측 조사에 의하면 현재 63칸이 보존되어 있다. 

 

남을 배려하는 삶

 

운조루의 자랑거리는 ‘타인능해(他人能解)’가 새겨진 큰 뒤주다. 운조루는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가장 살만한 곳이라 꼽을 정도로 좋은 풍수, 빼어난 경치, 비옥한 토지와 교통 여건을 갖췄으나, 딱 하나가 부족했다. 바로 인심이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타인능해(他人能解)’다. 타인능해(他人能解)는 ‘누구든 이 뒤주를 열 수 있다’는 뜻인데 쌀을 가져가는 가난한 사람이 부담스러워하지 말라는 배려가 담겨 있다. 뒤주에는 두 개의 구멍이 있는데 한 개의 구멍에 꽂혀있는 나무를 돌리면 다른 한 개의 구멍에서 쌀이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뒤주에는 쌀 200kg을 넣을 수 있다고 한다. 운조루에서 1년 수확량의 약 20%인 200kg을 가난한 이웃을 위해 내놓은 것이다.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그들이 굶어 죽지 않도록 하려는 배려다. 

 

격변의 시기에도 피해 없어

 

이곳은 근대 말부터 격변의 시기를 보낸 곳이었다. 1894년 동학혁명 때는 가난한 백성들의 항쟁이, 1948년 여순사건 때는 이념으로 대립했다. 흔히 지주들은 소작인에게 착취와 수탈을 강요했지만, 운조루는 나눔과 분배의 타인능해 정신으로 생활한 덕분에 변란에도 온전하게 유지될 수 있었다. 운조루 주변의 백성들은 아무리 경제적으로 힘들고 지쳤어도 운조루에서 베푼 타인능해의 넉넉한 인심으로 살아야겠다는 의욕이 생겼을 것이다.
 

또 하나의 자랑거리는 운조루의 굴뚝이다. 운조루에는 울타리 높이 이상으로 쌓아 올린 굴뚝이 없었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하게 섬돌 아래에 숨어있었다. 쌀 등의 곡식이 없어 끼니를 이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밥 짓는 연기는 얼마나 부러운 일이며 배가 더 고프게 만드는 일이기에 연기가 울타리 너머로 멀리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한 배려였다. 운조루는 경상북도 경주의 최부잣집과 함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을 보여준다.
 

운조루에서 나와 남서쪽으로 200m쯤 걸어가다 보면 2016년 4월 문을 연 운조루 유물전시관이 나온다. 이 집안의 1만여 점의 유물 중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100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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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알아보기)

 

이번 회에서는 운조루의 아름다운 경치와 한옥의 우아한 정취를 노래한 매천 황현의 시로 대신한다. 

 

전무풍검옥무진(田無豊儉屋無塵) 들에는 풍검이 없고 집에는 티끌이 없어
위차원림족은륜(爲此園林足隱淪) 이 원림을 만들어 은둔할 만하네.
두백이휴간세지(頭白已休干世志) 머리가 희어 이미 세상에 구하는 뜻을 고치고
안명난득해시인(眼明難得解詩人) 눈이 밝아 시를 해석하는 사람 구하기 어렵네.
화간약구명산향(花間葯臼鳴山響) 꽃 사이 약 절구통 소리 산에 울려 퍼지고
月下漁舟喚水隣(월하어주환수린) 달 아래 고깃배 물 옆의 이웃을 부르네.
最是西軒留客處(최시서헌유객처) 서헌은 객을 머무르게 하는 가장 좋은 곳으로
松風如雨酒生鱗(송풍여우주생린) 비와 같은 솔바람 술 위에 파란을 일으키네.

 

전회 해설)

 

<세종실록> 101권, 세종 25년(1443) 7월 19일 기사를 보면 세계 최초로 실시한 여론 조사라고 하겠다. 세종대왕께서 여론 조사를 하신 목적은 바로 백성들을 사랑하는 애민정신(愛民精神)이다. 이러한 애민정신으로 나타난 것이 훈민정음 창제이며, 그 밖에 과학기기의 발명이라 하겠다. <세종실록> 49권 세종 12년(1430) 7월 5일 기사에 ‘백성들이 좋지 않다면 이를 행할 수 없다’라는 내용을 통해 좋은 정책일지라도 백성이 싫다면 행할 수 없다고 했다. 절대왕권에서 얼마든지 정책을 맘대로 실시할 수도 있었으나 백성들을 생각하는 마음에 임금이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관리들의 부정으로 백성들이 힘들다는 것까지 생각한 성군(聖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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