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앗차!/ 시험문제를 보니 한숨이 먼저 나네/ 어젯밤에 한 번 더 볼걸!/ 연필은 가졌건만/ 종 이는 하얗을 뿐/ 시계의 바늘은 좀 잡아놓았으면/ 아아 종을 친다 어쩌나/ 하나도 못 쓴 답안을 낼라니/ 귀가 막히네 울고 싶으이’
1929년 ‘학생’이라는 잡지에 실린 김형두의 ‘시험잡영(試驗雜詠)’이라는 시를 보면, 그 때나 지금이나 시험지를 대했을 때 학생의 마음은 한가지인 듯하다. 인천대 국문학과 강사인 저자가 8년 동안 ‘대한매일신보’ ‘만세보’ 같은 당시의 신문과 잡지를 뒤적여 신문의 단골 뉴스 소재였던 ‘학교’의 모습을 복원해 낸 바에 따르면, 적어도 우리 선배들은 지금 같은 입시지옥에 시달리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말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학교인 ‘원산학사’가 학생을 모집한 것은 1883년. 그나마 몇 안 되는 학교에 입학할 학생도 부족했던 1880년대에는 용돈을 줘가며 학생들을 초청하는 ‘학생 품귀 현상’의 시대였다. 최근 대학들의 ‘학생 모시기’와 비슷한 풍경이라고 해야 할까. 때문에 1910년대까지 학생들에게 ‘입시지옥’이라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배우는 과목도 한문과 한글 강독, 글짓기, 산술, 체조가 전부였으며, 학생들은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한번 없이 아침 9시에 등교해 3시면 교문을 나서는, 태평세월을 보냈다.
물론 태평하기만 했던 건 아니다. 지금 생각해봐도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통과의례인 학년진급시험과 졸업시험이 그 것이다. 1등부터 꼴찌까지 명단을 공개하고 심지어 ‘독립신문’이 학교별 졸업시험 합격자 명단을 게재했다니…. 성적 순 줄 세우기 전통은 그 뿌리가 깊기도 하다.
100년 전 학교는 명문대 합격 대신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원하는 무사(武士)가 될 것을 권했다. 학생들은 역사시간에 을지문덕, 이순신 등 전쟁영웅의 이야기를 배웠고, ‘나파륜(나폴레옹)’ ‘비사맥(비스마르크)’ ‘화성돈(워싱턴)’의 전기에 열광하며 애국심을 키워냈다.
그렇다면, 100년 전 학생들은 모두 엄숙한 애국주의자였을까? 어느 시대에나 모범생이 있으면 불량학생이 있게 마련. 1900년대 학생의 3대 비행으로는 ‘술, 담배, 연극장 출입’이 꼽혔다. 중동학교에서는 담배를 피우면 점수를 깎았고, 1897년 영어 학교에서는 지각생에게 벌금 10전을 물렸다는 ‘독립신문’의 기록이 있다. 영화와 연극 볼 수 있었던 연극장에서는 ‘즉석만남’이 이루어졌다. 남학생들은 최신 엔카를 가르쳐주며 기생과 접하고, 여학생은 서양식 결혼식에서 들러리를 서는 등의 '학생 알바'도 생겨났다. 이렇게 ‘모던 걸’과 기생이 넘쳐나자, 언론은 학교와 가정에서 성교육이 필요하다는 기사를 싣기까지 했다. 이때도 원조교제와 계약연애가 있었다니….
신체검사와 체력장에 대한 기록도 흥미롭다. 1913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신체검사는 시작됐다. 총독부 훈령 제24호 '관·공립학교 생도 신체검사 규정'에 따라 매년 4월 학생들의 몸무게 가슴둘레 등을 파악한 것이 시초. 저자는 일제 강점기에 시작된 신체검사를 "황국의 건강한 신민을 육성하기 위해 국가가 몸을 표준화하고 감시하고 관리하는 체제"라고 주장한다. 체력장은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직후 일제에 의해 도입됐으며, 입학시험에 합격해도 체력장을 통과해야만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제도 역시 이 때 함께 마련됐다고 적고 있다.
1895년 정부가 발간한 초등학교 교과서 ‘신정심상소학(新訂尋常小學)’에는 학교란 ‘사람을 교육하여 성취하는 곳’이자 ‘사람의 마음을 아름답게 하는 곳’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서당 이후 근대적 학교는 다양성보다는 획일성을, 개인보다 국가를 중요하게 여기는 제국의 논리를 답습해왔다.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원칙을 내세워 성적이 아니면 얼굴, 싸움에라도 순위를 매겨 학생들을 줄 세워 온 학교. 100년 전 학교와 지금의 학교, 달라진 점이 있기는 한 걸까. 과연 우리의 학교는 100년 세월 동안 얼마나 진화해온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