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장마을’ 남긴 연산군 스승
제자위해 목숨 바쳐
명나라를 건국한 태조 홍무제(洪武帝)는 정비에서 낳은 다섯 아들을 비롯 26명의 왕자를 두었었다. 이 왕자들은 당시 봉건제도에 따라 전국에 나라를 갈라 주어 사병을 거느리게 했다.
다섯 정비 소생의 아들들이 변방 왕으로 나가기 전에 홍무제는 당시 중국에서 가장 소문난 지행일치의 거유(巨儒) 方孝孺(방효유)를 한림원 시강으로 삼아 자신을 비롯 황태자와 이 왕자들에게 제왕학을 가르치게 했다.
글이 짧았던 홍무제 자신도 틈을 내어 이 스승의 말을 듣곤했던 것이다. 곧 방효유는 명나라 건국의 문치적 역할을 담당한 제왕의 스승이었던 것이다.
홍무제의 손자 건문제(建文帝)가 즉위하면서, 삼촌들인 변방 왕들의 세력이 커나가는 것을 두려워하여 핑계를 대어 처형을 일삼았다. 이에 불안을 느낀 연왕(燕王)은 선수를 쳐 남경의 왕궁을 불사르고, 조카인 건문제를 추방해 죽이고 군신의 추대 형식으로 제위에 오른다.
이사람이 바로 수도를 북경 자금성으로 옮긴 영락제(永樂帝)다. 당시 건문제가 스승으로 곁에 받들고 있던 방효유는, 영락제에게도 스승이다.
건문제 측근들을 무참히 살해 제거했지만, 방효유는 스승이기도 하려니와 명성 높은 대학자이기에 등용하고자 즉위의 조서(詔書)를 짓도록 하명했다. 그 조서로써 전제로부터의 변심을 확인하고자 함이었다.
한데 영락제 앞에서 붓을 들고 간단히 써 바친 조서에는 ‘연나라 적(賊)이 제위를 강도질했다’고 씌어있었다.
영락제는 격노했고 중국사상 가장 혹독한 형벌이 가해졌다.
방효유의 일가일족 뿐 아니라, 처가나 외가 일족 그리고 그의 문하에 이르기까지 살해된자만 8백73명에 이르고있다. 이 많은 혈육이나 제자들을 한꺼번에 죽인것이 아니라 묶어놓은 방효유 안전에서 하나씩 하나씩 비명을 들려가며 죽였다.
물론 변심만 하면 형을 중단한다는 조건부였다. 그는 끝까지 스승으로서 제자인 영락제를 나무라고 스승의 길이 일가 일문의 멸족보다 위대하다는 것을 만방에 고하고, 취보문 밖 광장에서 처참하게 공개형으로 점진 살해당했던 것이다.
이 스승의 길을 이어받은 분이 연산군때 사도를 지키다 순절한 조지서(趙之瑞)를 들 수 있다. 학문이 뛰어나 소문난 조지서는 임금이 되기이전 세자시절 연산군의 스승인 세자시강원보덕 (世子侍講院補德)으로 있었다.
그는 사마초시(司馬初試)와 생원과(生員科) 사마중시(司馬重試)의 세 과거에서 모두 장원으로 급제한 삼장원으로 소문나있었기에, 세자 스승의 요직에 발탁되었던 것이다.
그는 행실이 고약한 동궁 연산군을 호되게 나무라고 훈계했으며, 공부를 소홀히 하면 아바마마 성종에게 일러 꾸지람과 벌을 받게 했다. 곧 사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임금으로 등극할 것이 뻔한 동궁이기에 사도를 버리고, 아부하여 마음에 들게해서 영달을 꾀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공부하고는 담을 싼 연산군과는 원한만을 남겼을 뿐이었다.
잘못된 행실 꾸짖어
갑자사화로 선비들의 학살을 시작한 연산군은 맨 먼저 이 스승을 잡아드렸지만, 묶여있으면서 스승으로서 임금의 잘못된 행실을 바로 잡으러 들자 입을 짓물러 버리고, 바라본다하여 눈을 빼버리고 끝내는 맷돌에 갈아 죽여서 한강에다 내어다 버렸던 것이다. 한국사도의 첫 순교자였다할 수 있다.
열부인 그의 아내 정씨가 그 한강에 흐르는 피를 치마에 묻혀 만든 치마무덤과 그가 태어난 하동군 옥종면에 삼장마을이라는 마을 이름으로 거룩한 그 사도가 남아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