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국경전쟁으로 인도군 1400여명 사망 지난 4월 분쟁접고 ‘전략적동반자’관계 합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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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
“서북부 인도 영토 중국이 강점” 주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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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
맥마흔선 남쪽, 근거 없이 인도 지배해 |
중국의 고등학생들이 사용하는 인민교육출판사의 ‘세계근대현대사’에는 1962년 중국과 인도의 국경분쟁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서술이 없다. 다만 1947년 인도의 독립, 1955년의 아시아 아프리카 회의, 1961년의 비동맹운동 등에 대해서는 기본 내용을 비중 있게 서술하고 있다. 중국교과서에서 중국과 인도의 영토 문제를 비교적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는 교재는 ‘전국 중-소학 교사 계속교육 교재’인 ‘세계정치 다극화와 지연정치’(인민교육출판사 2001)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2000년 중국과 인도는 국교수립 50주년을 맞이했다. 쌍방관계는 최근에 호전되었지만, 양국 사이에는 변계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1960년 저우언라이의 인도 방문 시기에 인도는 변계문제에 대한 담판을 거절했다. 1962년 인도는 변계충돌을 도발하였고, 중국은 자위를 위해 반격해야 했다. 1987년 인도는 맥마흔선 이남의 인도통제지역에 아루나찰 프라데시를 세워 중국의 주권을 엄중히 침해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9년 중국은 중-인의 협조 강화를 호소하여 동년 11월 쌍방은 변계문제 회담을 진행하였다. 2000년 5월 인도 대통령 나라야난이 중국을 방문하였고, 양국 관계는 일정한 정도로 복원되었다. 중국과 인도는 모두 경제발전으로 종합국력을 확대하기를 바라며, 모두 다극화된 세계를 수립하기를 바란다. 또한 양국은 모두 타이완문제와 카슈미르 문제 등에서 외국이 내부 사무에 개입하는 것을 반대한다. 화목하면 둘 다 이롭고, 싸우면 둘 다 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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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언라이가 1955년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당시에 저우언라이와 네루는 국제외교무대에서 긴밀하게 협조하고 있었다. 출처 2003 세계근대현대사(하) 북경: 인민교육출판사, 속지 사진 26번 |
앞의 설명은 중국과 인도 사이에 국경분쟁이 매우 중요한 사안임을 말해준다. 중국은 10여개 국가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데, 1960년대에 몇몇 나라와 국경조약을 맺었다. 그 시작은 1954년부터 논의된 중국-미얀마의 국경문제였다. 1960년 10월 1일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와 우누 미얀마 총리는 베이징에서 국경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상호 교환의 형식으로 성사되었는데, 중국측은 영국이 설정한 ‘1941년 선’을 사실상 인정하였다. 중국-미얀마 국경선은 전체길이가 2184km였고, 그중 티베트 구간은 187km였다. ‘중국-미얀마 변계조약’을 모델로 하여 중국은 잇달아 1961년 10월 5일에 네팔과, 1962년 12월에 몽골과, 1963년 3월에 파키스탄과, 1963년 11월 22일에 아프가니스탄과 변계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1962년에 인도와는 국경문제로 인해 전쟁까지 벌였다. 이것은 1950년대 인도와 중국이 우호적으로 서로를 대하던 것과는 크게 상반되는 상황이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왜 똑같이 오랜 문명을 자랑하고, 또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압박에서 독립하여 새로 국가를 창설한 두 나라가 전쟁까지 벌이게 되었는가. 그 계기는 1959년 3월 10일의 티베트 봉기였다. 이 봉기의 와중에서 14대 달라이 라마는 인도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전쟁의 더 본질적인 이유는 중국과 인도 사이에 ‘전통적인 습관 변경선’만 있었지, 국경이 정식으로 확정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중국과 인도 사이에는 약 2000km의 국경선이 있는데 양국의 국경선은 일반적으로 동단, 중단, 서단으로 구분한다. 중국 측은 전통관습선에 따라서 국경선을 획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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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부가 제기한 중국-인도 쌍방의 무장부대의 실제 통제선에 따라 모든 전선에서 각자 20km씩 후퇴하자는 제안의 표시도
중-인 변계 전체 지도 ① 서단과 중단 지도 ② 동단 지도(+인도군이 점거한 지동 지구 표시도)로 구성되어 있다.
(범례: --- 전통습관선, 1959년 ─실제통제선, ……맥마흔선, ---중국 측이 제안한 쌍방 후퇴 20km선, ● 인도군이 점거한 거점, ⓧ 인도군의 계절적 주둔지)
출처 인민일보 1962.11.18 |
중단의 경우엔 국경분쟁이 그리 크지 않다. 정식으로 획정되지 않은 중단의 국경선은 400 마일(643.6km)로, 그중에 몇몇 지점에서 분쟁이 있다. 분쟁지역은 크지 않고 200평방마일(518㎢)에 불과하다.
서단의 악사이친 지역은 신장, 티베트와 인도의 라닥과 연결된 변계다. 라닥은 1848년 영국에 의해 점거되어 카슈미르에 병합되었다. 서단의 변계는 정식으로 획정되지 않았고 단지 전통관습선이 있을 뿐이었다. 1865년 아쿱벡 세력이 신장에 진입한 이후 영국 측의 지도가 달라졌다. ‘신중국’ 수립 후 인민해방군은 1950년 말에서 1951년 가을에 서단의 신장, 티베트의 ‘전통관습선’에 따라서 아리 지구에 진입했다. 중국 측은 1954년에서 1955년 사이에 도로를 개설하기 위해서 악사이친 지역에 대해서 광범위한 측량을 진행했으며, 1957년에 신장과 티베트 사이에 도로를 개설했다. 이는 인도 측의 항의를 야기했다. 인도정부는 이 3만여 ㎢의 악사이친 지역을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중국 측은 1962년에 점령한 이후 중국의 고유 영토임을 주장하고 있다.
동단의 맥마흔 선 이남의 인도통제지역은 전통적으로 티베트의 관할권 아래 있던 지역이었다. 이 지역이 영국령 인도의 관할 아래 편입되기 시작한 것은 1913년의 심라회의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도-중국 국경의 동단의 분쟁 지역은 인도동북부 평원을 향하는 쐐기형태를 이루고 있다. 영국과 독립 후의 인도는 이러한 ‘쐐기 지대’를 주목했다. 영국인은 티베트 정부를 유혹하여 이 지역을 차지한 것은 ‘위험한 쐐기지대’를 제거하고자 하였다.
1913년 10월 13일 인도의 심라에서 영국대표인 인도외교부장 맥마흔이 주재하는 가운데, 티베트와 중국 측 등 삼자 대표가 모였다. 이듬해 세 나라 사이에는 심라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중국 측은 비준하지 않았다. 1914년 2월 17일 맥마흔은 티베트를 ‘내티베트’와 ‘외티베트’로 구분하고 ‘내티베트’를 중국과 티베트의 완충지대로 하자고 제안했다. 맥마흔은 또 인도-티베트로 변계로 9만 ㎢의 토지 위에 붉은 선을 그려 넣었다. 이것은 티베트의 독립을 돕는다는 조건으로 ‘토지와 독립을 맞바꾼 것’이었다. 티베트는 독립하지 못했지만, 영토는 영국령 인도에 속하게 되었다. 영국은 1944년 맥마흔선 이남의 땅을 취득하였다. 이에 대해 티베트 정부와 중화민국 정부는 승인하지 않았다.
1947년 8월 15일에 인도가 독립하였을 때, 인도는 영국령 인도의 유산, 특히 영토문제를 계승하고 있었다. 인도는 1949년 시킴을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1950년 4월에 인도와 중국이 수교하였을 때, 인도는 티베트에서 여러 가지 특권을 보유하고 있었다. 인도는 티베트의 여러 곳에 대표와 상업대표와 무역소를 두고 있었고, 티베트의 우정, 전보, 전화를 경영하고 있었으며, 티베트에 12개의 역참을 두었다. 1954년 4월 29일 중국과 인도는 티베트와 인도 간의 통상과 교통 협정을 체결하는 가운데 평화공존 5개 원칙에 합의하였다.
인도는 1953년까지 맥마흔선 이남의 지역을 통제하였다. ‘맥마흔 선’은 서쪽으로 중국과 부탄과 인도 삼국의 교차점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중국, 미얀마, 인도 삼국의 교차점인 디푹라에 이른다. 미얀마의 전례에 따라 중국 측은 국경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사실 ‘1941년 선’과 ‘맥마흔 선’의 성격은 같은 것이고, 중국의 관점에서는 영국 식민주의자가 중국의 영토를 강탈한 것이다. 그러나 중국 측은 국경문제의 안정이 긴요했기 때문에 ‘맥마흔선’을 승인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조건은 중국 측이 중-인 변계 동단의 ‘맥마흔선’ 안쪽 지역을 승인하는 대신 인도측은 서단의 악사이친 지역의 영토 요구를 철회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교환방식은 중국-버마 국경조약의 방식과 같은 것이었다.
왕스루 같은 중국학자는 당시 중국의 ‘동단과 서단을 교환 한다’는 일괄 타결 방안이 중국 측에 매우 불리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법률상, 중국은 일관되게 히말라야 산 남록인 전통관습선을 중국-인도 동단의 국경선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1950년대에 악사이친에 진입한 것도 전통관
습선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경제적인 이익의 관점에서 본다면, 동단의 9만 ㎢에 비해 서단의 3.35㎢는 훨씬 작다. 동단에 비해 대륙성 고원기후로 고산과 협곡이고 통행하기 어렵지만, 우량이 충분하고 자연자원이 많다. 반면에 서단의 악사이친 지역은 면적도 동단에 비해 좁을 뿐만 아니라 사람이 살지 않는 지대다.
전략상으로 보면, 인도-중국 국경선의 동단과 서단은 모두 중요하다. 서단의 악사이친은 신장 서부에서 티베트로 가는데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다. 1957년 10월 악사이친 도로가 개통되었다. 악사이친은 카라쿤룬산과 쿤룬산맥 사이에 있는데, 카라쿤룬산맥이 더 험하다. 그것은 중국 측에게 천연방벽이 될 수 있다. 악사이친 지역은 중국 신장 지역과 기본적으로 동일한 지리단위에 속한다. 악사이친 지구는 신장과 티베트 腹地로 진입할 수 있는 곳이고, 아프가니스탄이나 독립국가연합의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연계하기 쉬운 곳이다. 이곳의 방기는 중국의 우방인 파키스탄의 배후에 적을 두는 것이다. 이곳을 방기하고 인도는 중앙아시아 대국이 될 수 없다. 바로 이러한 전략적 고려에서 출발하여 인도는 중국의 ‘동단과 서단을 교환하자’는 일괄 해결 주장을 완강하게 반대한 것이다.
국경교섭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고 1962년 10월에 전쟁으로까지 확대되었다. 1959년 8월 25일 맥마흔 선상에서 가까운 랑주의 초소에서 쌍방 간에는 사격을 주고받는 일이 벌어졌다. 1961년 말부터는 인도군의 활동이 활발해졌고, 도처에서 충돌이 벌어졌다. 1962년 10월 20일 중국군은 국경의 서단과 동단에서 동시에 전면적으로 공격을 개시했다. 승승장구하던 중국군은 11월 21일 0시에 공격을 멈추었다. 이것은 중국 측이 당시에 전투의 승리보다는 국경문제의 해결에 더 관심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이 전쟁에서는 인도군이 더 큰 피해를 보았다. 1965년 인도 국방부는 인도군 사망 1383명, 실종 1696명, 포로 3968명이라고 발표했다. 대부분의 피해는 동단 전선에서 발생했다.
1962년 전쟁 이후 인도군과 중국군은 조용한 대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인도는 서북부의 인도 영토를 중국이 강점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중국은 인도가 맥마흔선 남쪽 지역을 근거 없이 지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영토분쟁에도 불구하고, 지난 4월 11일 인도 뉴델리에서 원자바오 중국 총리와 만모한 싱 인도 총리는 오랜 분쟁을 접고 다방면에서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갖기로 합의했다. 이러한 합의가 FTA로까지 연결된다면, 인구 23억의 거대한 시장이 등장하고 세계의 역학구도에서 변화가 발생할 것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 인도와 중국은 대국주의적 국가이기주의를 극복하고 국경분쟁이라는 산을 넘어야 한다
※ 다음 회는 윤영인 고구려연구재단 부연구위원의 ‘몽골문제와 교과서 서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