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국 교과서 육지국경선 합의, 해양 국경 불일치
남사군도 曾母暗沙, 양국 모두 자기 영토라 주장
육지 국경, 양국 관계 우호적일 땐 문제되지 않아
통킹 만 제외한 해양 국경선 분쟁은? 痔瑩幣璿禍?
베트남과 중국은 육지와 해양 모두에서 국경을 접하고 있다. 약 1274㎞에 달하는 육지 국경의 63% 정도는 운남과 통킹의 고원 지대를 가르며 28% 정도는 강과 내가 기준이 되며 나머지 부분에는 인공적인 표식물이나 직선을 기준으로 하여 국경 표시기가 세워져 있다. 육지 국경 지역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여러 소수 민족들이 상당히 복잡한 분포를 이루면서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국경지대에 사는 이들에 대한 관할권뿐만 아니라 국경 표시기들이 옮겨지면서 베트남과 중국 간의 육지 국경은 문제화되곤 한다.
베트남과 중국은 각기 동부와 남부로 열려 있는 바다를 공유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남지나해(베트남은 비엔동, 중국은 南海라 칭함)라고 부르는 이 지역은 세계 선박 교역량의 25%가 지나는 길목으로 전략상 중요하며 바다 밑에는 상당한 양의 석유를 비롯하여 천연자원이 매장되어 있어 경제적으로도 중요한 지역이다. 이 지역에서 베트남과 중국은 특히 통킹 만, 파라셀제도(베트남은 호앙싸군도, 중국은 西沙群島라 명명)와 스프레틀리제도(베트남은 쯔엉싸군도, 중국은 南沙群島라 명명)를 둘러싸고 이견을 표출하고 있다. 이를 반영하듯 베트남과 중국의 양국 교과서는 육지국경선에 대한 완전한 합의를 보여주는 반면 해양 국경에 대해서는 완전한 불일치를 보여준다. 즉 베트남은 호앙싸군도와 쯔엉싸군도를 베트남의 영토 주권이 미치는 영역으로 그리고 있으며, 중국 또한 서사군도를 포함해 자신의 영토 최남단은 남사군도의 曾母暗沙라고 분명히 교과서에 적고 있다.
최근 베트남과 중국은 1999년 12월 30일 육지 국경조약을, 2000년 12월 25일에는 통킹 만의 영해를 정하는 다른 조약을 체결하여 국경안정을 기했다. 현재에서 가장 가까운 시점에서 제기되는 중국과 베트남 간의 국경문제는 사실상 1975년에 시작, 1979년 전쟁(중월전쟁)으로 까지 비화되어 극에 달했다가 1991년에 일단락이 지어진 양국 간의 분쟁에 있다. 이후 10여 년간 베트남과 중국이 과거를 뒤로 하고 앞을 본다는 합의 아래 진행된 화해와 외교 정상화의 과정이 이어졌으며 1999년 말과 2000년 말 국경문제에 대한 합의는 베트남과 중국 간의 국경안정화를 포함한 외교정상화가 일단락되었음을 의미한다.
1999년에 체결된 육지 국경조약의 내용이 일반에 공개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국경조약의 준거조약과 문제가 된 영역은 분명하다. 준거조약이라 함은 1957년 말 베트남과 중국의 양 공산당이 서신교환을 통해 확인한 바 있는 중국과 프랑스의 국경조약들(1885년부터 1895년 사이에 양국이 체결한 일련의 국경조약과 협정들)이다. 베트남과 중국 간에 문제가 된 육지 영토는 1979년 중월전쟁을 전후하여 양국이 국경을 표시하는 표시기의 위치를 변경시키면서 문제가 발원한 지역으로 61평방킬로미터에 이른다. 중국의 부수상이 “분쟁 중인 지역 전체를 베트남에 주어 버리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라고 공개적으로 말할 정도로 크기는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었다. 이는 육지 국경지대가 독자적으로는 양국 간의 문제를 형성할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양국 간의 다른 문제에 갈등이 생길 경우 악화되고 반대로 양국 간의 관계가 우호적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음을 시사한다. 이 지역은 양국의 자존심과 감정이 충돌하는 영역에 속한다.
1954년 중국공산당이 노동자를 보내 베트남의 하노이에서 국경지대에 이르는 철로를 건설하는 작업을 도왔는데 이때 중국인 노동자들이 국경표시기를 베트남 영토 안쪽으로 300m 이동시켰다. 그 후 양국 관계가 우호적이었던 20여 년간 베트남은 이를 중국 노동자들의 단순한 실수로 여겼다. 1974년 베트남이 문제를 제기하자 중국은 이들 표시기의 원래 위치가 그곳이며, 예전 제국주의 세력인 프랑스의 강제로 중불 국경조약에 서명해야 했으며 당시 많은 자신의 영토를 베트남에 주었다고 강변했다. 이에 대해 베트남은 중불협정에 따른 분명한 국경선을 재확인하자고 제의했으나 중국은 중불협정은 기초가 될 수 있으나 현상(거주민 포함)을 고려하여 다시 국경 조약을 협상할 것을 요구하면서 협의에 의한 문제 해결이 무산되었다. 중국군은 1979년 국경선을 넘어 베트남의 23개의 읍을 유린하다가 17일 만에 목적이 달성되었다고 선언하고 철수했다.
그러나 중국군은 ‘베트남 영토에 속하는’ 전략적인 지대에서는 철수하지 않았다. 전후 베트남의 세관은 이전보다 남으로 480미터 뒤의 지역에 위치했다. 1991년 양국 외교 관계가 재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92년 랑썬 국경지대에서 양국 군대의 무장충돌이 있었다. 베트남에 따르면 중국군이 400미터 베트남 영토 안쪽으로 국경표시기를 다시 세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때로 이들 지역에서는 베트남 농민이 내쫒기고 대신 중국인들이 이주되었다.
1999년 육지 국경에 관한 협정이 조인되었을 때 양국은 국경선을 따라 70개의 분쟁 지역이 고려되었다고 발표했으나, 자세한 내용이 없어 이들 지역의 크기와 위치는 어떤지, 어떻게 분쟁이 해결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확실한 것은 현재 베트남과 중국 양국은 육지 국경에 대한 일단의 합의를 보았으며, 우호를 바라는 분위기에서 육지 국경에 대한 큰 의견의 차이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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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과 중국의 육지 국경선
현재 베트남과 중국 양국은 육지 국경에 대한 일단의 합의를 보았으며,
우호를 바라는 분위기에서 육지 국경에 대한 큰 의견의 차이는 없다.
소순정 저, 중법월남관계시말, 하남교육출판사 2000, 270~271페이지. |
2000년 말 베트남과 중국은 합동발표를 통해 통킹 만에서의 영해를 정하는 조약에 서명했다고 밝혔다. 통킹 만은 베트남 북부와 중국의 하이남(海南)섬 사이에 있는 바다이다. 1974년부터 문제가 된 통킹 만의 관할도 육지 국경의 경우처럼 중불국경협정에 기반을 둔다. 그러나 양국은 이를 달리 해석했다. 베트남의 지리적인 모양은 S자 형태이다. 중불국경조약 체결 당시 중불합동국경획정위원회는 S자가 시작되는 점에 위치한 몽까이(芒街)을 시작점으로 해서 남쪽을 향해 지도에 붉은 선을 표시했다. 이를 두고 베트남은 이 붉은 선 서쪽에 있는 수역은 베트남의 영토에 속하며, 동에 있는 것은 중국에 속한다고 해석했다. 이에 대해 중국은 이 붉은 선은 어느 나라가 주위의 제도를 소유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도서 분계선이지 베트남의 주장처럼 해양국경선은 아니라고 반박했다. 베트남으로서는 중불협정 당시 프랑스가 베트남의 라이쩌우 지방 최북단에 있는 영토를 일정 정도 중국에 양보하는 대신 얻어낸 통킹 만에서의 권리를 지켜야 한다고 보았던 반면 중국은 당시 힘이 약한 상태에서 상당 정도 양보했던 통킹 만에서의 권리를 찾아야 한다고 보았다. 중국의 주장에 따른다면 통킹 만(350만 평방킬로미터)의 3/2가 그 영해에 속하게 되므로 1992년 과학조사, 지진조사, 석유조사 등의 명목으로 파견한 선박은 분명 중국의 영해에서 활동한 것이 된다.
2000년 조약은 바로 이 통킹 만에서의 문제를 해결했다. 그 방식은 양국의 공동 해역을 포함하여 도서 분계선과 해상국경선에 동시에 합의를 본 것 같다. 비엣끼에우(越僑) 사회에서는 이 조약으로 인해 베트남 영토수역의 35,000평방킬로미터 정도가 중국의 영해에 속하게 되어, 천년이 넘게 전통적으로 베트남을 중국과 구분해 주었고 베트남 독립의 자랑스러운 상징인 남꾸언로(Nam Quan Pass)가 이제는 중국의 깊은 안쪽에 위치하게 되었다며 베트남공산당의 매각행위에 항의하는 목소리가 있으나 통킹 만에 대한 양국 당국의 이견은 상당 정도 해소되었다고 보인다.
위 두 차례의 조약 체결과 관련, 양국 모두 남지나해의 파라셀제도와 스프레틀리제도에 대해서는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다. 이는 문제의 중요성과 타결의 어려움을 드러내 주는 반증이다. 이에는 이 두 제도가 중불국경조약과 같이 양국이 인정하는 준거조약도 없을 뿐만 아니라 양국 모두 먼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가 ‘발견’과 ‘점유’의 증거를 들이대지만 최근에야 이해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현재진행형이며 앞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 앞에서 특히 베트남이 자신의 주권을 관철시키기 위해 동원하는 역사적인 근거와 이 두 제도에서의 베트남의 위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베트남은 최소한 17세기 다이비엣 시절 호앙싸(이 경우 파라셀제도와 스프레틀리제도 모두를 의미)를 발견하고 점령했으며, 응우옌왕조는 이 제도에 깟방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지배하는 등 주권을 공고히 했다. 중국이 이 제도에 대한 주권을 방어하기 위해 쓰고 있는 개념은 조공과 책봉 관계에 기반 한 ‘종주권’이지만, 이는 오늘날의 ‘자유세계’나 ‘사회주의세계’에서처럼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여 그 세계에 제휴한다는 의미 이상을 가질 수 없으며 베트남 왕들은 중국 조정의 의견을 묻지 않고 독립적으로 대내외적인 통치를 행했다. 게다가 봉건시기 중국 조정이 가지고 있던 약간의 영향력도 19세기말 프랑스와의 조약에서 베트남의 독립과 주권을 인정함으로서 완전히 사라졌다. 프랑스 식민시기 응우옌조정도 이 제도가 베트남에 속해왔음을 확언했으며 식민당국도 이를 당연시했다. 1939년 일본이 스프레틀리제도를 점령했으나 프랑스 식민 당국이 이에 항의했다. 1954년 제네바회의로 17도선을 임시군사분계선으로 베트남이 남북으로 분할된 이래 남베트남은 이 제도에 대한 효과적인 지배를 계속했으며 1976년 베트남의 통일 이후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은 호앙싸와 쯔엉싸를 포함하여 전 영토에 대한 국가 기능을 수행해 왔다.
파라셀제도에 대한 역사적인 근거 제시에서 중국은 베트남 보다 떨어진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사실은 현재 중국이 이 제도를 점유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일본의 항복 이후 중국(국민당정권)은 국제평화회의를 비롯하여 여러 차례 파라셀제도에 대한 중국의 주권을 요구한바 있으나 인정받지 못했으며, 1956년에 가서 암피트리트제도(Amphitrite, 파라셀제도는 동부제도와 서부제도로 구분되는데 그 중 동부제도로, 베트남에서는 놈동, 중국에서는 宣德礁라 함)를 점령했다. 당시 북베트남은 중국의 점령을 인정했으며 1958년 이 입장을 재확인했다. 북베트남은 당시에는 미국과의 전쟁에 중국의 지원이 중요했기 때문에 상황 상 그러한 입장을 취했다고 하면서 나중에 이를 취소했다. 남베트남이 전파라셀제도에 대한 주권을 주장하며 동부섬인 크레센트제도(베트남에서는 놈떠이, 중국에서는 永樂群島라 함)에 군대를 주둔시켰을 때 북베트남은 이에 대한 중국의 항의에 동조하지 않았다. 1974년 1월 미국이 남베트남에서 군사적인 개입을 종료하자 중국은 크레센트제도 마저 점령했다. 남베트남 해방 전쟁에 몰입해 있던 북베트남이 중국의 점령에 대해 공식 선언을 발표하여 불만을 표현하면서 영토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을 요구했으나 중국은 근거 없는 이야기라고 묵살했다. 이후 파라셀제도에 대해 중국은 군사, 경제 그리고 정치적인 면에서 지위를 확고히 해 가고 있는 한편 베트남은 계속 자신의 역사적인 권리와 주권을 주장하고 있다. 중국이 현실적으로 점유하고 있는 이 제도에 대해 베트남은 회복이나 수복보다는 스프레틀리제도에서의 분쟁을 유리하게 협상하는 카드로 사용할 가능성이 더 많다. 베트남과 중국뿐만 아니라 대만, 필리핀, 말레이시아가 그 일부를 점령하고 있는 스프레틀리제도에 대한 문제는 동남아시아에서의 영토문제라는 제목으로 실리게 될 다음 편에서 상세하게 논의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