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목적 과거청산, 또 다른 청산 대상 될 수 있어
獨·佛 과거청산 통해 나치 가담·동조자 면죄부 부여
해방 60년. 우리 사회는 지금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일제 강점하 진상규명위원회 등 일제시대의 기억을 복원하고 성찰하는 ‘과거 청산’작업이 한창이다. “과거의 비인적인 행위를 기억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새로운 감염의 위협에 쉽게 노출된다”는 독일 전 대통령 바이츠제커를 인용하지 않더라고 ‘친일’은 제대로 집고 넘어가야할 문제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과거 청산’이라는 행위 자체가 새로운 청산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에 그 문제가 있다.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이 말 한대로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고, 미래를 지배하는 자가 현재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세계의 과거사 청산'(푸른역사)은 이렇듯 국가의 선별작용을 통해 잊혔던 기억을 복권하는 '선택적 기억'의 유혹을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안병직 서울대 교수 등 11인이 쓴 이 책은 독일 프랑스 스페인 남아프리카공화국 아르헨티나 칠레 러시아의 과거사 청산을 추적, ‘ 모델로 삼을 수 있는 과거사 청산의 준거나 모델은 없다’는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다.
모범적 과거청산사례로 알려진 독일의 ‘나치 청산’과 프랑스의 ‘대독 부역자 처벌’도 ‘청산과 숙청’ 과정의 문제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이 책은 지적한다. 2차 대전 승전국들이 주관한 ‘탈 나치화 작업’은 ‘강요된’ 과거청산이었기 때문에 독일 국민들이 진정 반성하고 참회할 기회를 박탈했으며, 침략전쟁의 책임을 파헤치고 단죄하는데 그쳐 유태인 대량학살에 대한 규명에는 소홀했다. 또 이러한 청산작업이 나치에 가담한 대다수 독일 국민의 죄의식을 씻어 주기 위한 ‘집단 방어행위’였다는 주장역시 대두되고 있다.
프랑스의 전후 처리도 마찬가지다. 초법적 인민재판 형태로 진행된 1만 여 명의 즉결처형, 독일군과 성관계를 가진 여성에게 가한 공개 폭력 등 나치와 다를 바 없는 인권탄압이었던 청산작업이 과연 우리의 모델이 될 수 있는지 이 책은 의문을 던진다. ‘부역 지식인 숙청’은 나치에 암묵적으로 동조한 대다수 프랑스인에게 면죄부를 부여하기 위한 ‘희생양 만들기’였으며, 극소수에 불과한 레지스탕스의 신화화는 드골 정권의 영광 창출에 이용됐음도 폭로됐다.
반면 프랑코 독재시대의 고문과 학살행위에 대해 ‘망각’을 택한 스페인의 과거사 청산방식을 실패사례로 단정할 수 없다고 이 책은 설명한다. ‘망각협정’은 과거를 들춰 또 다른 내전의 촉발이라는 정치적 파국을 막기 위한 스페인 국민의 집단적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경우도 성공과 실패라는 이분법적 시각으로 바라봐서는 안 된다고 이 책은 주장한다. 독재정권 처벌에는 한계를 보였지만, 군부를 무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점진적으로 과거청산을 이뤄내고 민주주의를 정착시킨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스탈린 시대의 불법 테러를 청산하려던 러시아는 탈 스탈린에 대한 향수로 인해 소련 체제 붕괴라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다. '정치적 억압에 대한 부정적인 기억과 강력한 국가에 대한 긍정적 기억의 교차'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정치적 목적으로 이루어진 과거청산 작업은 국민 대다수의 내면적 성찰을 이끌어 낼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 책은 ‘처벌’과 ‘단죄’만을 요구하는 우리 사회의 과거청산 논란에 일침의 메시지를 보낸다. ‘세계의 과거사 청산’을 통해 진정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역사의 교훈’ ‘민족정기의 회복’이라는 명분 아래 숨어 있는 정치적 의미를 깨닫는 것이다. 과거청산은 단순히 처벌과 단죄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얻으려는 시도가 아니라 화해와 관용이 궁극적 목표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